3화.

by우홍강

그렇게 계절이 한 칸 넘어갔다. 봄이 슬그머니 모서리를 접고 물러난 자리에, 교복 소매가 한 마디씩 짧아지는 여름이 들어섰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벚나무는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무성해졌고, 창문을 열어 두면 매미 소리가 수업 내용보다 먼저 교실을 채웠다.


우리는 여전히 도서관에 갔다.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윤은 늘 가디건을 챙겨 왔고, 나는 그 가디건 소매가 바카라상 너머로 넘어와 내 문제집을 덮을 때마다 괜히 모른 척했다. 기말고사가 끝나던 날에는 처음으로 둘이 영화를 보았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상영관이 어두워지자 윤이 팔걸이 위의 내 손등에 제 새끼손가락을 슬쩍 걸쳤던 것만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윤은 점점 더 자주 시선의 표적이 되었다. 얇아진 교복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적었고, 윤은 어디에 서 있어도 눈에 띄었다. 복도를 지나가면 다른 반 남자애들이 창문에 매달렸고, 계단에서는 낯선 선배들이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윤은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그날도 매점 뒤편이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늘 한 무리의 선배들이 죽치고 앉아 있던 그늘. 질이 나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얼굴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지나가는 윤을 턱으로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쟤랑 한번 하면 어떨까……."


뒤에 무슨 말이 더 붙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끝까지 들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한 문장에 엉겨 붙은 웃음이, 이미 그들의 됨됨이를 전부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처음 알았다. 분노라는 감정을. 귀가 먼저 뜨거워졌고, 그다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하나는 코를 감싸 쥔 채 주저앉아 있었고, 다른 하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손을 내젓고 있었다. 내 주먹의 마디마디가 뜨겁게 부풀어 있었다. 평생 처음으로, 나는 누군가를 실컷 두들겨 팼다.


멀리서 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화난 얼굴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아주 오래 참아 온 사람이, 그 참음이 갑자기 쓸모없어진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때는 그 표정을 읽을 줄 몰랐다.


그날 오후, 보건실 침대에 앉아 얼음주머니를 주먹에 대고 있을 때 윤이 커튼을 걷고 들어왔다. 보건 선생님은 잠깐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윤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더니, 얼음주머니를 빼앗아 내 손등에 다시 꾹 눌러 댔다. 차가워서 손가락이 저렸다.


"왜 그랬어."


"그냥."


"그냥으로 사람을 그렇게 때려?"


"……네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니까."


윤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내 손등을 내려다보며 오래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매미가 한꺼번에 울었다가, 한꺼번에 그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살 수 있는 사람도 있어."


. . .


학교폭력대바카라위원회가 열렸다. 절차는 엄숙했고 어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무거웠다. 긴 테이블 한쪽에 나와 부모님이, 맞은편에 선배들과 그 부모들이 앉았다. 어머니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아버지는 위원들의 질문에 짧게, 정중하게 답했다. 회의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유는 있었냐."


"……네."


"그럼 됐다."


아버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무뚝뚝한 세 마디가, 위원회의 어떤 결정보다 무겁게 내 어깨에 얹혔다.


그러나 정작 여론은 묘한 쪽으로 흘렀다. 사정을 전해 들은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새 '정의 구현'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멋있다느니, 사내답다느니. 덕분에 징계는 받았어도 이미지에 난 흠집은 깊지 않았다. 반장과 학생회 자리에서는 쫓겨났다.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 자리들은 윤에게 닿기 위해 내가 놓은 다리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다리는, 이미 건넌 뒤였다.


사달은 여름의 끝에서 났다.


어느 오후, 정문 쪽이 소란스러웠다. 행색이 노숙자나 다름없는 중년의 사내가 비척비척 교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술 냄새가 몇 걸음 밖에서도 진동했다. 경비 아저씨가 막아서려 했지만 사내는 그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가 향한 곳은 하필 윤이었다.


"이년이!"


사내는 다짜고짜 윤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윤의 고개가 모질게 꺾였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그를 떼어 내려 했고, 그가 버텼고, 그러다 밀었다. 사내는 맥없이 뒤로 넘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제야 나는 윤의 얼굴을 보았다. 분노도 공포도 아닌, 그저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내가 넘어뜨린 사내는, 윤의 아버지였다.


전과가 있고, 도박 빚에 쫓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윤은 그런 아버지를 피해 작은아버지 댁에 얹혀살고 있었다. 두 정거장 앞에서 내리던 이유를, 나는 그제야 알았다. 얹혀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그보다 더 나중에야 알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사내가 핏발 선 눈으로 윤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사내새끼 끼고 노는 게, 꼭 지 애미랑 똑같네!"


윤이 뒷걸음질 쳤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돌아서서 뛰었다. 나는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달려온 친구들이 내 팔을 붙잡았다. 윤의 등이 본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늘 가로등 아래를 혼자 걸어가던 그 뒷모습이, 처음으로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