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by우홍강

이후의 일들은 순조로웠다. 나는 별 탈 없이 9반의 반장이 되었고, 학생회의 권유로 그 일원이 되기도 했다.


반장 선거라고 해 봐야 칠판에 이름 두 개가 적히고, 손이 몇 번 올라갔다 내려간 게 전부였다. 나는 단상에 서서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짧게, 적당히 웃기게, 너무 잘난 척하지 않게. 아이들이 웃었다. 창가 세 번째 줄만 웃지 않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사이 반 아이들은 벌써 나와 윤을 한 쌍으로 묶기 시작했다. 둘 다 이름이 외자인 데다 키가 크고, 무엇보다 '그림체가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야, 반장. 너 윤이랑 그림체 완전 똑같은 거 알아?"


솔직히 그 말이 거북했다. 차라리 내가 무슨 행동이라도 해서 나온 말이라면 나았을 것이다. 입학하고 2주가 지나도록 윤과 나 사이엔 접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같은 반이라는 사실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윤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이어폰을 꽂고 엎드려 있거나, 문제집을 폈다. 점심시간에는 급식실 구석 자리에서 혼자 빨리 먹고 먼저 일어났다. 말을 걸면 대답은 했다. 짧게, 정확하게, 그리고 더는 이어지지 않게. 아이들은 금세 그녀를 '도도하다'는 말로 정리해 버렸다. 나는 그 말이 어딘가 틀렸다는 걸 막연히 느꼈지만, 무엇이 틀렸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접점은, 꽃이 피기 시작하던 첫 모의고사날에 비로소 생겨났다.


처음으로 학교 바카라상에 앉아 치르는 모의고사는, 무엇보다 허리가 아팠다. 집의 푹신한 의자가 아니라 딱딱한 바카라걸상에 몇 시간을 붙들려 있어야 했으니까. 창밖에서는 운동장 가장자리의 벚나무가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고, 감독관 선생님의 구두 소리가 교실 뒤편을 천천히 오갔다. 시험이 끝나자 나는 뻐근한 허리를 펴며 막 배부된 답안지를 챙겼고, 다들 가방을 싸 들고 빠져나가는 교실에 혼자 남아 곧장 채점을 시작했다.


빨간 펜이 동그라미를 그려 나가는 소리만 사각사각 이어졌다. 그러다 등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저기, 반장. 혹시 수학 잘해?"


윤이었다. 나는 정답지에서 눈을 들며 되물었다.


"왜?"


"29번. 혹시 풀었어?"


"풀었지."


"나 그거 한참 붙들고 있었거든. 선행을 안 해서 기본 다질 시간이 부족했나 봐."


"3월 모의고산데. 죄다 중학교 범위잖아."


"그렇지만 여기 있는 29번 문제, 분명 중학교 수학의 사고로 접근하기 힘들어서."


음, 분명히 그랬다. 여기 이 사고는 고등수학의 사고로 접근해야 더 빨리 풀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 느낀다는 것은 그녀도 공부를 어느 정도 한다는 것이었다.


"자, 옆에 앉아 봐. 알려 줄게."


"어. 고마워."


윤이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샴푸 냄새인지 섬유유연제 냄새인지 모를 무언가가 옅게 났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시험지 여백에 그래프를 그렸다. 꺾이는 점을 짚고, 거기서부터 거꾸로 따라 올라가 보라고 했다. 윤은 내 펜 끝을 따라 눈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작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 짧은 소리가 이상하게 오래 귀에 남았다.


"이렇게 보면 되는구나."


"응. 거꾸로 보면 쉬운 문제야."


"거꾸로 보면 쉬운 거, 많지."


윤은 그렇게 말하고 시험지를 접었다.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그녀는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교실 문 앞에서 한 번 뒤돌아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게 다였다. 나는 그 고갯짓 하나를 들고 그날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수학적 교류를 토대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쉬는 시간마다 문제집을 들고 오는 윤과, 그걸 기다리는 내가 생겼다. 그러다 주말에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었고, 어느새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도서관 앞 벤치에서 자판기 율무차를 나눠 마시던 어느 저녁, 내가 "우리 이제 사귀는 거지?" 하고 물었고, 윤은 대답 대신 내 컵을 가져가 마저 마셨다. 그걸로 충분했다.


사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문제집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고, 해가 지면 같은 버스를 탔다. 다만 윤은 언제나 자기 집보다 두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데려다주겠다고 하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걷는 거 좋아해."


"같이 걸으면 되잖아."


"혼자 걷는 걸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너무 단정해서, 나는 더 조르지 못했다. 버스 창밖으로, 가로등 아래를 혼자 걸어가는 윤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나는 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았다. 그 애가 좋아한다는 걸 지켜 주는 게,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어느 주말, 열람실의 흰 형광등 아래에서였다. 윤이 펴 둔 문제집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휘야. 넌 내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무척이나."


"너도 알잖아. 나, 친구 없는 거."


"예뻐서 다들 범접을 못 하는 거겠지."


"야, 나 진지해."


"알아."


나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난 네 외모에 반했고, 지금은 네 내모에 반하는 중인데."


"……내모?"


"내적인 모습 말이야."


그제야 윤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친구 없는 사연 같은 건 난 잘 몰라. 네가 사람을 한 걸음씩 밀어내는 그 모습도. 다만 거기에도 이유는 있겠지. 그리고 난, 그 이유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윤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천천히 웃었는데, 그 웃음의 끝이 어딘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