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by우홍강

대개 사랑이 그러듯, 나의 사랑도 이별 뒤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조금 천천히.


처음엔 그저 말수가 줄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헤어진 사람이 으레 그러듯, 한동안 입이 무거워진 거라고. 전학 첫날, 새 교실의 교탁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할 때도 그랬다. 이름을 말하고, 어느 학교에서 왔는지 말하고,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했다. 나는 이름까지만 말했다.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른 남짓한 낯선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담임이 헛기침을 하며 "긴장했나 보다" 하고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그게 긴장 탓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아침, 식탁에서 어머니가 무언가를 물었을 때였다. 새 학교는 어떠냐고, 친구는 좀 사귀었느냐고. 나는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거기서 멈췄다. 분명 할 말이 있었다. 혀끝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이 목구멍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도로 가라앉았다. 입술만 한 번 달싹였을 뿐이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든 채 나를 보았다. 아버지가 신문을 내렸다.


"휘야?"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리가 되기 직전의 무언가가 목에 걸려, 숨만 새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날 이후로, 말은 자꾸만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부르면 닿던 것이, 부를수록 더 멀어졌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하루에 몇 마디씩 줄었다. 처음엔 문장이 사라졌고, 그다음엔 단어가, 마지막엔 '응'이라는 소리마저 목에 걸렸다.


병원에 간 건 그래서였다. 이비인후과에서 신경과로, 신경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 몇 주에 걸쳐 진료실을 옮겨 다니는 동안 나는 수십 번 입을 벌리고, 수십 번 숨을 참고, 수십 개의 기계에 몸을 맡겼다. 진료실에는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 줄로 나란히 앉았다. 의사는 한참 모니터의 검사 수치를 들여다보더니, 펜을 내려놓고 부모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 소견으로는, 전환장애로 보입니다. 요즘은 기능성 신경학적 증상 장애라고도 부르는 진단입니다."


옆에서 어머니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맞쥐었다 폈다, 그것만 반복했다.


"뇌 영상도, 후두 내시경도, 청력과 신경 반사도 전부 정상입니다. 성대에도 이상이 없어요. 다시 말해, 아드님이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신체적인 원인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시점 이후로 발화가 거의 사라졌고, 지금은 함구(緘默)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그럼…… 우리 애가,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어머니의 목소리가 끝에서 가늘게 떨렸다.


"네. 의지의 문제도, 꾀병도 아닙니다. 감당하기 힘든 심리적 충격이 신체 증상의 형태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말을 안 하기로 마음먹은 게 아니라, 말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마음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목소리를 거둬 갔다고,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의사의 시선이 잠깐 내게 머물렀다.


"대개는 방아쇠가 된 사건이 있습니다. 무의식이 감당하기엔 너무 컸던 무언가요. 최근에 아드님에게,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부모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올 여름 그 일, 학교폭력.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는 동안,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에게 짐작 가는 것이, 나에게만은 너무 분명했으므로.


"조급하게 말을 시키거나 다그치는 건 오히려 증상을 굳힙니다. 안정적인 환경과 시간, 그리고 꾸준한 심리치료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계기가 분명한 경우는 회복도 더딘 편이 아니에요. 본인이 그 일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을 때, 목소리도 천천히 돌아옵니다."


천천히. 의사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았고, 어머니는 조수석이 아니라 뒷좌석의 내 옆에 앉았다. 라디오도 켜지 않았다. 와이퍼가 이따금 앞유리를 쓸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어머니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을 때, 아버지가 룸미러로 나를 보았다.


"천천히 하자."


그리고 잠깐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


"우리도 천천히 할게."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다시 앞을 보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움직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 수 있었다 해도, 그 말에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어머니가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 주부터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실에는 작은 탁자와 티슈 상자, 그리고 공바카라 한 권이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말 대신 써도 된다고 했다. 나는 공바카라을 펼치고 펜을 쥐었다. 오늘 기분은 어떤지, 잠은 잘 자는지. 그런 질문에는 곧잘 답을 적었다. 괜찮아요. 조금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 여름 이야기를 꺼내면,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잉크가 한 점에 고여 번져 나갔다. 나는 그 번진 점만 오래 내려다보았다. 쓸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쓸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걸 쓰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우습게도, 나는 늘 말이 무기인 사람이었다. 원하는 자리에 가닿기 위해 보기 좋은 미소를 골라 끼우고, 상황마다 필요한 말을 골라 던지던 사람. 입학 첫날 학생회 단톡방에 슬그머니 끼어든 것도, 반장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말로 한 일이었다. 그런 내가 단 한 사람에게 건넨 단 한마디 때문에, 그 무기를 통째로 잃었다.


"나도…… 이젠 좀 지쳐. 내가 언제까지 네 일에 휘말려야 하는데."


그 말에 윤은, 언젠가 끝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던 바로 그 웃음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내 이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며. 네가 그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