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by우홍강

대개 사랑이 그러듯, 나의 사랑도 이별 뒤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조금 독하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부 머금은 걸까. 아니면 아름다움이 그녈 삼킨 걸까. 고등학교 입학 전, 신입생 소집일에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의 미덕을 알아버렸다.


2월의 끝이었다. 강당 안은 난방이 덜 돌아 입김이 희미하게 보일 만큼 추웠고, 새 교복을 아직 받지 못한 아이들은 저마다 중학교 시절의 패딩을 걸친 채 반별로 줄지어 서 있었다. 검정, 남색, 회색. 비슷비슷한 색들이 강당 바닥에 끝도 없이 깔려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녀만이 다른 색이었다.


그녀는 단풍잎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계열의 갈색 떡볶이코트를 입고 있었다. 큰 키와 아름답다는 말이 도리어 초라해 부끄러워지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 외모는 뭇 남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나 역시도 해당했다.


그 까닭으로 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집중하지 못했다. 교장이 무슨 말로 학교를 자랑했는지, 신입생을 향해 어떤 당부를 남겼는지. 또한 중간 중간에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찾아온 같은 중학교 친구들의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에게 건성으로 손을 흔들며, 줄과 줄 사이로 그 갈색 코트가 어디쯤 서 있는지만 눈으로 좇았다.


소집이 끝나자 아이들이 한꺼번에 출구로 몰려들었다. 나는 인파를 헤치며 그 코트를 따라가려 했다. 두 걸음 앞, 세 걸음 앞. 그러다 강당 문을 나서는 순간,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그녀를 놓쳤다. 이름도, 반도, 학년조차 모른 채로.


소집이 끝나고 나는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다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연출로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떠나고, 배기가스가 하얗게 흩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멍함의 정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것도 제법 독한 종류로.


. . .


"아무래도 여자친구 때문이겠죠?"


"뭐… 휘 말이야? 뭐, 그렇겠지. 사춘기이기도 하니까."


"멍을 자주 때리는 게, 무슨 고민이 있는 건지. 물어봐도 그것만큼은 입을 안 여니 말이에요."


"당신이, 잘 지켜봐 줘요. 그 나이 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부엌으로 새어 나오는 어머니의 걱정이, 아침을 뜨는 내 자리까지 고스란히 닿았다. 다만 나는 그 걱정 속에서도 장조림에 박힌 메추리알만 하나하나 골라 먹고 있었다. 어머니의 짐작은 절반만 옳았다. 중학교 졸업식 날 나는 2년 가까이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졸업과 함께 서로 다른 학교로 흩어지는 마당에 굳이 이어 갈 이유가 없다는, 둘 다 어른스럽다고 믿었던 이유였다. 나는 분명 한 여자 때문에 넋을 놓고 있었으나, 그 여자는 헤어진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신문을 접으며 내 쪽을 한 번 보았다.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이 달싹였지만, 결국 국을 한 숟갈 뜨는 것으로 끝났다.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9분 전 알림을 받고서야 나는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예정보다 버스가 빨라, 정류장까지 뛰어야 했다. 두 번은 놓치지 않겠다는 오기 같은 것이었다. 버스 카드리더기에 카드를 찍고 올라타니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 여유롭게 옆자리 친구와 떠들고 누구는 거듭 휴대폰과 버스 전광판을 쳐다보았다. 그중 나의 자리는 여유로움이었다. 버스에 탑승하고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으며 3월 모의고사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 수학 기출 문제를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이었지만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 없었다. 음악 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학생과 온라인 게임인의 소음, 그리고 그 외 잡다한 것들도. 다만 정류장에 설 때마다, 새로 오르는 사람들 가운데 갈색 코트가 있는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학교 정문에는 동아리 부스가 도열해 있었고, 그 사이에서 한 여선배가 나를 알은체했다.


"너가 휘! 맞지? 예상대로 인기만점이겠는데?"


"선배님, 톡방과는 사뭇 다르시네요."


나는 보기 좋은 미소를 하나 골라 끼우며 답했다. 사실 학생회에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소집일에 본 그 애가 선배인지 신입생인지, 나는 그것 하나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현장에 있던 학생회 선배에게 관심 있는 척 다가갔고, 단톡방에 들어갔고, 어느새 학생회의 일원처럼 굴고 있었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신입생 명단을 밤마다 위아래로 넘겨 보았지만, 이름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야, 휘야. 벌써 10분 전이다. 미안, 나만 신나서 떠들었네. 어서 가, 조회 늦겠다."


'9반이 이쯤인가?'


나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 끝에서 두 번째인 교실의 뒷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이 옆으로 미끄러지는 소리가, 조용하던 교실 안에 생각보다 크게 번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삼은 듯 교실 안의 모든 고개가 한꺼번에 나를 향했다. 앞줄의 남학생들이 먼저, 그다음 창가 쪽 여학생들이, 마지막으로 칠판 앞에 서 있던 담임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분필을 쥔 채로. 서른 남짓한 시선이 일순간 한 점으로 모이는 감각은 제법 새로웠다.


그리고 그 얼굴들 가운데, 그토록 수소문하고도 끝내 찾지 못했던 그녀가 있었다. 창가에서 세 번째 줄, 오전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자리였다. 갈색 코트는 의자 등받이에 반으로 접혀 걸려 있었다. 다른 얼굴들이 호기심과 옅은 웃음기를 띤 채 나를 훑는 동안, 그녀만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교실의 모든 소리가 어딘가 먼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분필이 칠판을 긁던 소리도, 누군가 의자를 끌던 소리도, 나를 향하던 다른 모든 시선도 함께 흐려졌다. 세상에 그녀와 나, 단둘만 남은 것 같았다. 둘 사이의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팽팽했고, 그 덕에 나는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거기, 늦은 학생.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담임의 목소리가 먼 데서 들려왔다. 누군가 수근거렸다. 나는 대답도 제대로 못 한 채 빈자리를 찾아 걸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