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려도, 떡볶이나 먹고 오겠군.

[시간을 달리는 소녀] + 20 주년

by오래된 도서관

"누구를 만나러 시간을 달려 20년 전으로 갈 거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지금도 다 만날 수 있어. 사람 보러는 안 갈 것 같은데."



시간을 달려 도착한 소녀, 마코토는 첫사랑 치아키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런 몽글몽글하고 노란 계란찜 같은 정서 대신, 교복 입고 기다려 본 것이라고는 분식점 테이블에서 떡볶이 접시가 전부였던 식성 좋았던 여고생은 대답할 가치가 낮은 질문이다.

남들은 꿈만 먹어도 배부른 때라는데, 난 어째 교복 입던 시절을 소환해 와도 핑크핑크 하고 몽글했던 추억 하나가 없는 것일까?


영화 개봉 20주년으로 4K 화면으로 재개봉해 주는 영화처럼 20년 전으로 돌려보내준다고 한들, 난 교복 입은 여고생이 아니다.

그래도 시간을 달려 원하는 시점으로 갈 수 있는 마코토의 능력처럼 몇 년 더 거슬러서 교복을 입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누구를 만날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겹쳐 볼 만한 일본 감성은 실제 우리 학교의 교복이 세일러칼라 디자인이었다는 것뿐이다.

흰 세일러칼라 상의에 진한 감청색 스커트.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우리 학교 학생이었다고 해도 어울릴 비주얼은 완성되었겠지만, 내가 포함된 무리들은 청량하게 스니커즈를 신고 달리는 대신, 저 예쁜 교복에 벽돌색 체육복 바지를 껴 입고 굳게 잠긴 담벼락을 넘어 분식점으로 향하던 생활밀착형 여고생 쪽이었다.


가끔 줄리엣을 보러 담을 넘어오는 로미오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우리는 로미오를 기다리는 줄리엣보다는, 머리카락을 내려 떡볶이와 콜라를 외부에서 공수해 오는 별동대에게 종이박스를 받아 담장 밖 간식을 끌어올리는 라푼첼에 가까웠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라보는 마음은 부러움 3, 걱정 4, 간식에 대한 기대 3 정도의 비율을 가진 구경꾼 말이다. 그러다 사랑의 쓴 맛을 보고 눈물샘 터뜨리는 줄리엣에게 말없이 휴지와 간식을 건네주기도 했다.

나도 안다. 우리는 저렇게 눈물 흘리는 줄리엣 시점에서는 엑스트라라는 것쯤은.

그래서 사랑에 목숨도 걸 수 있는, 설익고 뜨거운 청춘을 여전히 주인공으로 보는 세계관에서는, 저렇게 시간을 달려 원하는 과거에 도착할 마코토의 결정이 첫사랑 앞이라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난 식량 박스 낚던 라푼첼이다.


그 귀한 능력을 가진 채, 과거로 갈 때는 번호 여섯 개 정도는 잘 외우고 가야 하는 것 아닐까?

도착하자마자 번호 여섯 개는 포스트잇에 잘 적어놓고, 친구들과 함께, 지금은 다 사라져 갈 수 없는 그때의 학교 앞 분식점에도 들러야지.

과거로 돌아간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질지는 몰라도, 돌아오기 전에만 로또를 사면 되니, 그전에 과거의 호사를 다시 누리고 돌아오고 싶다.

그런데,

'아...... 교복 입는 학생은 로또를 못 사는구나!'

게다가 로또는 나의 성년 이후에 생긴 것이군...

시간을 달려 과거에 도착하는 것은 한 번만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 회귀는 한 번만 가능하다고 해도,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며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당첨자가 된 후 돌아오면 되지 뭐.

아니, 이렇게 되면 몇 년 후의 당첨 번호를 다시 외워 와야 하잖아? 내가 가지고 온 번호는 쓸모없는 것이니. 아니면 1년 치 대학 등록금을 빼돌려 전액 삼성전자 주식이라도 사놓아야 하나?


누가 보내준다고 한 적도 없는 시간 여행에 진심으로 기분이 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영화 속 마코토에게 주어진 설정으로는 몇 번이고 시간을 달려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이래서 미성년자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미 어른이 된 지금 곱씹어보는 시뮬레이션도 이렇게 삐거덕거리니 말이다.


그리고 한편, 이렇게 미래를 다 알고 되돌아간다고 해도, 어느 한 지점 쉽게 고쳐 볼 수도 없는 것 아닐까?


"시간을 달려 돌아가도, 난 떡볶이나 먹고 오겠군."


그런 면에서 보면, 저렇게 떡볶이밖에 모르던 애가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내 인생이 용케도 안 삐뚤어지고 잘 서 있는 것은 생각할수록 신통하다.

이래서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힘든 것이라고들 말 하나?


다음번 시간을 달릴 때 어른이 된 후 당첨될 운명의 번호 여섯 개를 OMR카드에 적을 미래를 예고해 두고, 이번에는 줄리엣들을 좀 더 관심 있게 관찰하고 돌아가야겠다.

주변의 많은 줄리엣들의 연애서사를 들으며 간접 경험도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헛똑똑이에게, 나와 똑 닮은 얼치기 로미오에 낚여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으로 시집가기 전의 과거쯤은 조금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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