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벨제붑의 노래]
"타짜 시리즈인데 제목이 왜 이러지? 벨제붑은 또 뭐 하는 냥반인가?"
파리대왕이라고? 그 소설 <파리대왕>?
신문지에 싼 핏기 덜 빠진 고깃덩이를 본 기분이 들었던 소설 <파리대왕>의 숨은 실체가 벨제붑씨였군.
뭔 바카라 이름이 이렇게 성의가 없지? 하는 웃기는 제목이네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가 의외의 충격을 주었던 바카라이었다. 막상 읽고 난 뒤에는 딱히 꼬집어 낼 수 없었지만 제목이 바카라의 내용을 배신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이유가 '썩은 고기에 들끓는 파리들의 왕'이라는 악마의 존재를 몰라서 퍼즐 한 조각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군.
느닷없이 '타짜'라는 영화 시리즈의 끝에서 <파리대왕>의 벨제붑의 이름을 보게 되다니.
타짜 시리즈가 전부 도박에 인생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에 방금 전까지는 모르고 있던 벨제붑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검색해보기 전만 해도
'쓸데없이 뭔 영화 제목을 이렇게 어렵게 지었지?'
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입 밖으로 꺼내서 투덜대기 전에 조용히 검색해 보길 잘했다. 무식을 들키기 전에 이렇게 숨길 기회도 있고, 세상 참 좋아졌다.
이래서 나이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나보다.
손이 뒤적뒤적 지갑 여는 사소한 노동을 하는 동안, 입이 실수하지 않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인가?
당연하게도 나는 벨제붑의 노래 같은 것은 들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벨제붑의 노래를 듣고 있는 도박판 위에 사는 저 인생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걸? 그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그들의 '운빨'에 자신이 있었고, 어딜 가서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지는 나는 내 '운빨'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 좋은 운 덕에 지름길이 눈에 보이는데, 그걸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지름길이 눈에 보이는데 먼 길 돌아갈 사람도 몇 없을 테고.
나의 가장 먼 '운빨'에 대한 기억은, 꿀벌과 함께 써온 피의 역사이다.
산이나 들은 물론, 심지어 남해의 뻘밭에서도 나는 꿀벌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이였다. 갯벌 한가운데 벌통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뜨끔 하는 손 끝의 감각과 바닷물 젖은 뻘에 힘없이 떨어지던 꿀벌을 내려다보던 한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내가 벌통 근처나, 꽃 근처에 있던 것도 아닌데 이 꿀벌은 대체 왜 하나뿐인 목숨이 달린 벌침으로 나를 쏘고 죽는 것일까?'
이제 이 정도 일에는 엄마를 부르며 울지도 않는 열 살의 나는 손톱으로 벌침을 뽑아버리고 바닷물에 그대로 손을 담가 눈물 찔끔 내며 소독도 했다.
그리고,
"왜 또 나만 쏘냐!"
그 갯벌에 나를 포함해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있는데.
이문열의 소설의 제목처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날 수 있기 때문에 추락사의 위험성을 안고 살게 되는 역설이 생긴다. 또 물을 좋아하는 서퍼들은 익사사고의 위험성을 대비하며 익스트림을 즐긴다. 물에도 못 뜨는 사람은 물에 대한 공포감이 크기 때문에 되려 물에 빠질 일을 만들지 않는다.
어쩌면 남다른 '운빨'이 있는 부류들이 벨제붑의 노래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도박판 위에 사는 그들은 모두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들일지 모른다.
운에 기댈 수 없어 그냥 남들 하는 노력만큼은 다 하고 살아야 하는 재수 없는 사람이라 참 다행이다.
카드 잘 뽑는 손이었으면 타짜 1편에서 아귀 손에 '손모가지 날아가분' A 씨가 될 수도 있다. 타짜 시리즈를 볼 때마다, 내가 A 씨도 아니고, A 씨의 자녀도 아니고, A 씨의 배우자도 아니고, 심지어 A 씨의 지인조차 아니라는 심심한 인생 패턴에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 덕에 영화관 등받이에 푹 눌러앉아 팝콘 집어먹으며 진짜 남의 일 보듯 감상할 수 있다.
"얼마나 좋아.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하나같이 재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