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아나]

by오래된 도서관

새들이 물어다 씌워준 앞치마를 두르고

동물들이 청소를 해 주는 동안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놀고먹는 백설공주는 디즈니가 보여준 환상 그 자체였다.


'저렇게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노래하며 사는 백설공주로 살리라!'


그리고


"왕자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하는 동화바카라 백스테이지에 도착한 후.



나는

공주와 화음 맞추던 새도,

공주의 싱크대에서 물놀이하며 설거지를 돕던 다람쥐도 아닌.

배경으로 걸려 뒤에서 대걸레 밀던

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머리빗과 딱풀을 들고

노래하는 두 공주님의 발걸음을 뒤따르며

간식으로 준 감자 밟고 지나간 자국을 닦는

부지런한 쥐.



그 후, 동화 속 공주들은

2D애니월드의

7 공주파 백설 언니의 시대를 지나


성탑에서 불 뿜는 용을 후드려 잡고

자기 발로 걸어 나와

3D시대를 연 피오나 일진 언니의

공중회전 발차기와


라푼젤 언니의

프라이팬 핸들링으로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 시대의 공주는

용에 맞서 작대기질 하는 기사와 함께

생활 전선을 함께 넘는

전우라는 것을.'



디즈니는 이렇게

귀여운 미키의 얼굴을 하고는

의외로 현실적인 여성상을 제시해 왔다.


동화를 딛고 선

극 현실주의자.

디즈니.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이렇게나 잘 읽던

오랜 친구가

요 몇 년간

인어공주와 백설공주 실사화 영화 때

허방을 딛고 넘어졌다.



전직 공주로서,

디즈니에게 섭섭했다.



안타깝게도

꽤 오랜 기간

소모적인 차력쇼를 반복하며

코피가 터지던 디즈니가


드디어

[모아나]를 꺼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폴리네시아의 족장, 모아나 역할을 폴리네시아 사람에게 주었다는 점.


딱풀 들고 함께 노래하던 우리 공주의 마음에 쏙 든,

선한 마음과 강단 있는 모아나의 리더십이

반갑다.


비록

따가운 햇볕과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모래의 거칠한 감촉은

느낄 수 없겠지만,


에어컨 빵빵한 영화관에서

그림 같은 태평양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간접 눈호강을 할 기대로 한층 더 반갑다.


세월의 파도를 격파해 온

게으른 전직 공주의 실패 없는 바캉스는

에어컨과 함께!



그런데.

족장의 딸, [모아나] 이야기를 보면,

이제 맞벌이 시대를 넘어

우리 공주가 탄 배를 수평선 너머로

밀어 보내줘야 하는 때가 온 것 아닌가?


코코넛에 꼽힌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선글라스를 끼고 썬베드에 누운 상상중,

귀에 꽂은 꽃을 빼며

긴급 유턴을 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딱풀 마이크로 모아나와 노래하던 큰 딸은

올해 고3이다.


문득

속 상해서 울 일 생길 때마다


"여자는 이깟 일로 울지 않습니다!"


빨강 모자 쓴 군인아저씨 흉내 내며

농담처럼 달래 왔던 나의 말들이


히피펌 풍성한 모아나의 손에

옴팡 쥐게 쥐어진 노와

모아나 옆에 선 거대한 마우이의 투샷에

겹쳐 들려온다.


한 입에 남은 생을 꿀꺽 삼켜버리고도

잔잔하게 푸른 새침을 떨 수 있는 바다로,


곧 '나의 [모아나]'의 모험이 시작된다.


내가 일러 줄 수 있는

육지의 지혜만으로는 부족한

수평선을 향한 모험.


용에 맞서 왕자와 함께 작대기질을 해 본 전직 공주는

이제 파도를 향해 걸어가는

다음 공주의 등 뒤에 남을 시간이 되었다.


이제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파도 위가 아닌

해변에 놓인 선베드인 것처럼.


다시 돌아온 대항해시대의 서막과

참 잘 어울리는 시작이다.


마우이가 장난스레 일으킨

풍랑을 뚫고


"출발!


테 피티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