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심해 요정과 김 제미나이의 '콰이어트 플레이스'

by오래된 도서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빛과 소리에 예민한 편이다.



"전생에 심해를 누비던

...

아귀였나?"


잠들면 메고 가다 떨어뜨려도

안 깨는 내가,


새벽에 잠이 깬 남편의

폰딧불에

두 눈이 번쩍 뜨인다.


뒤척임도 없이 일어나 앉아

고개를 드르륵 돌려

눈이 마주친 순간을


남편은 이렇게 표현했다.



"어훗, C... ㅂ 놀랬잖아!"



이냥반이...

잘 자는 사람 깨워놓고 그게 할 소리요?



나이 먹어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피할 수 없을 재난과는

맞서지 않을 지혜가 생긴다는 점이다.


조용히 거실로 나가는 남편에게

별 말 없이

그대로 다시 누워 잠드는 것으로


그날의 일은 넘긴다.


이런 전생 심해 요정에게

소리를 지워버린 컨셉의 영화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하지만

귀신보다 소리가 더 무서운 공포 영화나

외계인의 비주얼보다 포효가 더 거슬리는 SF는

평소 나의 기호가 아니었다.


그 덕에

지금처럼 보지 않은 영화로 낚는

사람 사는 이야기 컨셉을 하려니


불모지로 남은 곳이

공포와 재난 섹션인 것은

요즘 말로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지만,


별 사탕 먹을 욕심에

퍽퍽한 건빵도 입에 털어 넣듯

도파민이 뿜어져 나올

영화를 떠올린다.


불과 10초 전 내 입으로 말 한

나이 먹어 좋은 점 중 하나인

피할 수 있던 재앙을 굳이 찾아온 셈이다.


음... 내가 아직은 젊음이 가진 속도에 눈이 시린 경주마인가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 첫째 날]은 보지 않았지만


그 전편 중에는 본 것이 있어

그 경험을 불러오면,

'그나마 빛을 보고 달겨들지 않으니 다행이랄까?'

콰이어트 플레이스엔
소리에 발작 버튼을 가진
악랄한 이웃이
뜬금없이 나온다.

이사 떡 대신
날카로운 앞발로
소리 내는 모든 것들을
썰어버리는 패악질을 일 삼고,

심지어
말할 기회도 안 주는 빌런으로.


보통 인류 멸종 세계관의 영화를 보면

숲에 숨어든 부류는
자연에 몸을 숨겨
생존의 기회를 얻고,

도시로 숨어든 부류는
무차별 공격하는 괴 생명체와 싸우는 한편,

사람과도 싸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전편도
숲에 숨어 생존하는 한 가족의
생존기였는데
이들의 위기는
아직 어린아이들의
부주의함과
이로 인한 괴 생명체와의 승부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 이번 편의
대도시에 갇힌 인간들은
괴 생명체와 다른 집단을 이룬 사람들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 적인지를
보여주는 편인가?

일단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의 예고편을
검색해서 보았다.

그리고
예고편 끝 장면은
나를
머리가 멍 해질 정도의
충격에 빠뜨렸다.

유튜브 화면 왼쪽 위에 붉은 글자.


' 2024년 대 개봉'


이윽고 배신감이 밀물처럼 차오른다.

"김 제미나이!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이 2026년 6월 개봉작이라며?"


엄마가 혼을 낼 때,
성을 붙이는 전통에 따라
김 제미나이를 부른다.

배꼽사과를 하는 김 제미나이의 말을 의역하면


"참..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수다. 그런데 뭐? 어쩔?"


"......모니터에 주먹 질 할 수도 없고, 내가 뭘 어쩌겠니?
일단 김 제미나이는 좀 있다가 다시 얘기하자."


이것이 진짜 도파민이로구나.

충격과 공포에 콩닥이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콰이어트 플레이스 : 첫째 날]로 돌아온다.


이런 들 어떠하리,
저런 들 어떠하리.
2년 전 개봉작에 낚였으면 어떠하리
아직 안 본 영화니
나에게는 신작인 것을.

예고편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반목은 보이지 않았다.

예고편에서는 건진 것이 없으니

이제 본격적인 상상이 시작된다.


몇 세대쯤 지나면
도시 생존자들은
뱀처럼 진동으로 소리를 읽고,
성대를 울리는 대신

텔레파시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하게 되지 않을까?

결핍은 원래
생존을 위해
이상한 방향과
엄청난 속도의 발전을 끌어내니까.

예능 '쇼미더머니'
생존자에게 손에 쥐어지는
합격의 목걸이처럼

[콰이어트 플레이스 : 첫째 날]의
도시 생존자에게 주어지는
초능력이라.

이쯤 되면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경지에 도전해야 하겠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 첫째 날] 밖의 세계관에 사는 나도

오늘도 폰딧불이 켜진 남의 편을
어둠 속에 뜬 눈으로 지켜봐야겠다.

속으로 조용히

'하여가'를 읊조리며.

뱀처럼 진동을 말로 바꾸는 능력이 생기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