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컴] 호러의 정석

by오래된 도서관

"봤는데, 뭘 본 것인지 잘 모르겠는 이 예고편은 뭐지?"

어딜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쫄보라, 지금까지 본 호러 영화는 몇 편 안 된다.

그나마도 반은 눈을 감고 본 셈이라 기억나는 것도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 몇 없는 빈약한 데이터를 저 예고편에서 모두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미개봉작 예고편인데, 오래전 봤던 영화 같은 기시감은 무엇인지. 꿈에서 봤나?


첫 장면부터 문고리도 잡기 싫은 호텔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난다.

비에 축축해진 숲 속에 자리 잡은 호텔. 혼자 방문 한 남자. 호러 영화 주인공답게, 이 사람도 위기의식을 느끼는 센서가 둔감해 보인다. 나 같이 초식동물의 민감도를 가진 등장인물은 보통 첫 희생자가 되어 조기 퇴근을 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출연하는 주인공은 갖은 고생 끝에 죽거나, 죽을 만큼 고생을 하다 겨우 살아서 지긋지긋한 죽음의 공간을 나간다. 주인공의 고생문이 열리는구나.


영화 [호컴]의 예고편에서 주인공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호텔 직원들과 조금씩 눈에 광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마을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호텔은 굳이 어두워진 밤에 전기가 안 들어온다.


"그런데, 정전이 되면 라이터 말고 랜턴 들고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이쯤 되면 [호컴]은 연쇄살인마가 어둠을 틈 타 하루에 한 명씩 도륙을 내는 슬래셔 무비 쪽인지, 천 년의 원한을 품은 악령이 이 숲과 마을의 산 것들을 모두 지옥으로 인도하는 로드무비(?) 쪽 인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영 불친절한 예고편은 끝날 때까지 이렇게 말한다.


"안 알랴줌! 궁금하면 와서 보던가."


예고편 속 주인공은 기어이 그 호텔에 들어가 방을 잡는다.

딱 봐도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곳을 왜 굳이 찾아가는 것인지. 산뜻한 여행길에 쉬어야 할 안락한 호텔이 아니라 굳이 '스틱스'강에서 캠핑 자리를 잡는지? 하지만 안전하게 영화 밖에서 보고 있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영 마뜩잖은 기분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다시 한번 말 하지만, 저 문 손잡이 돌리는 건. 난 반대일세.


본편은 거의 감은 눈으로 볼 사람이, 예고편 보면서는 훈수가 줄줄 나온다. 축구는 못 해도 경기 보면서 한 마디씩 보탤 수는 있지 않은가.


그간 인간의 공포는 '모르는 것'이 주는 예측 불가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게 익히 보아 온 낡은 클리셰라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클래식의 수명이 한 세기를 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다만, 알아도 무섭고, 모르는 건 더 무서운 것일 뿐. 눈앞에 선 것이 호랑이든, 소복 입은 귀신이든, 칼 든 괴한이든 뻔해 보여도 위협인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이 내뿜는 공포의 색이 제각각 빨강, 파랑, 검은색으로 다른 것일 뿐.

화면 내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는 뻔뻔하게 묻고 있었다.

'알려주면 안 무서울 것 같니?'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여러 번 가져 봤다. 난 우리 동네 으뜸 쫄보였으니까. 하지만 두려움, 공포 등의 감정은 생존의 위협이 다가올 때 켜 지는 알람 같은 것이다. 평소 잘만 다니던 어두운 골목길 앞에서 유독 겁쟁이 모드가 팍 켜지던 날, 굳이 멀리 돌아 간 그날에 요행히 위험을 피했을지 모를 일 아닌가.

좀 과민한 알람을 가진 탓에 좀 정신과 다리가 피곤할 뿐, 쫄보의 안테나는 생존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경사는 예측에 실패해도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기분 좋은 '서브라이~즈!'가 될 뿐. 하지만 위험 예측에 실패하면? 식은땀 나는 상황이 팔만대장경만큼 떠오른다.

이런 성향 덕에 '고감도 쫄테나'는 그 뻔하고 짧은 예고편을 보는 내내 들 숨, 날 숨을 신경 써서 쉬어야 했다. 맨 발로 깨진 유리를 콰드득 밟아 흰 양말이 순식간에 빨간 피로 물드는 장면을 보면, 종이에 손을 베였던 기억이라도 꺼내 와 피부를 스치는 날카로운 통증이 내 것인 것처럼 느끼는 것처럼. 예상되는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을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호러 마니아들은 도대체 이런 불편함의 어디에서 도파민을 챙기는 것일까? 하기는 시간과 돈을 지불하고, 영화관으로 간접 경험을 사러 가는 사람이 꼭 꽃동산 같은 것만 보라는 법은 없다. 갈등이나 스트레스 없는 영화는, 일단 영화관에 걸리지 않는다.

하다 못해 힐링 장르도 눈물 쏙 빼는 스트레스를 체험하게 한 뒤 빨간 약을 발라주지 않나.

[호컴]이라는 영화의 분위기가 주는 공포 앞에서도, 난 스크린 앞에 앉아 보기만 할 뿐, 위험과 생존을 위한 고생은 저 투숙객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데?'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이렇게 아는 맛이 주는 확실하고 안전한 도파민이라면, 추위에 곱은 손으로 에베레스트 빙벽 등반보다 소비할 만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 틈을 건너는, 만년설원을 지나는 개미 신세가 되지 않고도, 간 쪼글 해지는 간접 경험을 영화 티켓 한 장 값으로 살 수 있으니.

결국 호러는 죽음의 위협이 주는 스트레스에 무력하게 노출되는 장르가 아니라, 안전하게 살아남는 주인공의 감각을 빌려 쓰는 장르로 느껴진다.

호러와 익스트림은 같은 도파민 돼지저금통을 쓰는 장르인지도 모른다.

그 덕에 오늘은 오래도록 먼지만 먹던 내 도파민 돼지 저금통 바닥에, 땡그르르 동전 하나를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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