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되면
한 손에 굳게 리모컨을 꼭 쥐고
낮잠에 든 남편을 본다.
내가 어릴 때의
아빠의 이런 형태의 낮잠 의식은
TV 제어권을 가진 가장의
권위의 상징이었다.
리모컨을 손에서 빼 내면
잠든 스핑크스를 깨우는 셈이라
TV앞에 가서 손으로 꾹꾹 눌러 채널을 돌리면
"아빠 안 잔다."
라는 소리에 메두사의 눈과 마주친
불운한 모험가가 되는...
오늘.
지나갈 때마다
홈쇼핑과 영화가 번갈아 나오는
외로운 바보상자의
성실한 출력은
단지 이 남자가
얼마나 오래 자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지만.
말린 청국장 환 광고가 나오던 TV에는
이제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자연스러운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가 나온다.
영화 까막눈에
사람들 얼굴 구별 능력이 떨어지는
나도 알아볼만한
유명한 여배우의 젊음이
새삼 눈길을 잡았다.
스칼렛 요한슨이었다.
아까 청국장 환 광고 때 귀퉁이에 "아일랜드"라고
쓰여 있던 게 이 영화 제목이었나 보다.
밀린 집안일들을 하며
곁눈질로 보는 영화 내용은
장기 기증용으로 복제한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
언젠가 가게 될 꿈의 세계.
'아일랜드'에 갈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충분히 그럴법한 설정이라
'저렇게 사육당하는 사람들 있을 수도 있겠네.'
를 어느새 수긍하고 있었다.
저 영화 설정보다
이 수긍이 더 파괴적인 것 아닌가?
영화 [트루먼 쇼]는
저 정도로 한 사람을 속이려는 노력이면
속아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쇼를 위한 세트장이 아닌
여분의 장기로서 사육되는
인간농장을 들여다보는 불편함은,
그래도 인간다움 삶을 제공하고 있는
얄팍한 친절함에 고까운 감정이 훅 끼친다.
정리된 수건들을 수건 장에 넣고
다음 빨래들을 분류해서
세탁기 일 시키고 돌아오니
남자 주인공이 스칼렛 요한슨에게
심각하게 속삭이는 장면이 되어 있다.
'저 남자가 탈출하려나 본데?'
같은 사육이지만
빽빽한 닭장 대신
대관령 목장의 목가적인 풀밭이
사육의 의미를 희석하듯,
어쩌면 내 삶이
바로 내일 엔딩일지,
100년 후 엔딩일지 모르고 사는 나는,
대관령 목장에서
위장 네 개를 다 채우고 되새김질 중인
행복한 소의 안락함이 보장된
'아일랜드'를 꿈꾸는 저들보다 나은 게 맞겠지?
물론 정해진 때가 되기 전까지는
굶거나 아파 죽을 일이 없는 저들보다
고달프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야생의 삶을 사는 내가.
아니 우리의 삶이
진짜니까.
풀 뜯기보다 고된,
생 풀을 천천히 소화하는 오랜 되새김질은
야생의 들판에 앉아
매너리즘과 피로에 굴복한 몸과
게으른 몸 대신
도파민 수혈을
영화 한 편으로 때우는
주말 오후를 보내는
심심하고 안락한 야생인간의 바쁜 사유처럼...
복제인간들이 탈출하려던 낙원 '아일랜드'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꿈속의 꿈을 찾아 현실로 나왔다고 믿었지만
실은 더 큰 꿈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일 뿐.
장자의 나비가 아일랜드를 날아든 것인지,
우리 집 거실에 날아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