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직업이 이렇게나 많은데

칩거

by서윤재

회사에 다닐 때 한 번쯤은 원 없이 바카라을 쌓아두고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백수가 되고 나니 바카라을 원 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목만 들어봤거나 추천받았던 바카라들을 실컷 읽고 후기를 기록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갔다. 내가 이용하는 도서관에서는 한 번에 열 권까지 바카라을 빌릴 수 있으며, 다른 도서관에 있는 바카라을 내가 이용하는 도서관으로 보내주는 상호대차도 다섯 권까지 가능하다. 바카라에 빠져든 나는 도서관에 매일같이 들락날락거렸다.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석체크를 하다 보니 도서관에 계신 사서선생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백지상태에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도서관 사서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회사에는 다시 취업하고 싶지 않은데, 도서관이라면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서분들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니 그 나름의 고충은 있겠지만, 그래도 바카라 가까이에서 일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은 한쪽 손목에 손목보호대를 하고 계셨기는 하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일을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백수라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서가 되는 방법을 알아보니 석사학위 소지자의 경우 한국사서교육원에 입학해 2급 정사서 과정을 이수하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한다. 학비가 부담되긴 하지만, 1년만 다니면 사서로 일하기 위한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 1년 정도는 소득원이 없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사서자격증이 있다고 해도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서 자격증이 있으나 채용을 기다리는 대기자들도 있고, 서울의 경우에는 사서로 채용되기 위한 경쟁이 세다고 한다. 한국사서교육원에 가서 수료하더라도 곧바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도 채용 공고가 떠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일자리를 얻게 될지 모른 채 기다려야 한다는 현실이 조금은 막막하게 느껴졌다.




40대의 나이에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럴 때 가까운 일가친척이 자영업을 한다면 함께 일하면서 일을 배워볼 수 있었을 텐데, 주변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신다. 가까운 사람 중에 전기기사나 목공, 타일공, 도배공처럼 기술로 먹고사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울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기술을 학원에 가서 배워볼까 해서 알아보니, 요즘은 일거리가 없고 영업경쟁이 심하다며 무급으로 1년 정도 따라다녀야 기술을 알려주거나 그다음에 일거리를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알려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껏 기술을 가르쳐줬더니 독립해 버리고, 나중에는 경쟁 관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척정도가 아니라면 기술을 배우는 것도 어렵고 일거리를 따는 것에도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을 들으니 학원에 다니며 새로 진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다른 직업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여 유튜브에서 여성 버스기사나 여성 덤프트럭 기사처럼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찾아보았는데,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유튜브에 영상까지 업로드하는 모습을 보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싶다. 집에서 칩거하며 인생을 일시정지 누른 것 같은 상태의 내가 보기에는 그 모습이 참 빛나보였다. 나도 다시 직업을 갖고 내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며, 내 일로 인해 다시 빛나는 날이 올까. 과거에 했었던 IT개발은 늘 힘들었고, 버거웠지만, 가끔씩 빛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런 순간이 또 올지 지금은 모르겠다.




친화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비중이 큰 일보다는 기술을 쌓아 일하는 것이 나은 것 같아서 이왕이면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기술을 축적하는 일이 더 편안하다. 요즘 같은 영업경쟁이 필수인 시대에 기술만 있어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IT개발처럼 기술의 비중이 큰 일이라면 일의 결과가 사람과의 관계에 크게 좌우되는 일보다는 좀 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예전부터 IT개발 일이 힘들 때마다 IT개발 외에 기술 하나쯤은 배워보고 싶었다. 해녀의 잠수 기술이나 타일공의 기술처럼, 진입장벽은 높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나의 숙련도가 쌓이는 일을 하고 싶었다. IT개발은 상대적으로 그런 업무 중 하나지만, 과거 일해왔던 기간 동안 기술이나 업무 방식이 많이 바뀌기도 했다. 숙련도가 쌓인다기보다는 업무가 바뀌거나 개발환경이 바뀔 때마다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초기화되는 것 같아 아쉬움도 있었다. 어떤 프로젝트는 개발까지만 담당하다 보니, 그 이후 프로젝트가 어떻게 운영되고 개선되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전체 과정에 대한 경험치가 쌓이지만,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마다 다시 처음부터 파악하고 쌓아가야 하는 과정이 피로했던 적도 있었다. 나는 숙련도가 쌓일 때 안정감을 느끼고, 그럴 때 온전히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일을 처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반복할수록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기술과 경험이 자연스럽게 쌓이는 일을 하고 싶다.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10대 때부터 대장장이의 길로 들어서 어느새 연차가 쌓인 한 청년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시골에 살면서 농사와 집수리, 대장장이 일 등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기술을 이미 습득한 후였다.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도시를 떠나면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석사학위까지 취득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대장장이처럼 장인이 되면 도시 밖에서도 먹고사는 것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기술을 익히고 갈고닦을수록 경지에 오르는 숙련된 기술자가 되는 것은 어떤 삶일까. 그런 일이라면 내가 기피하는 영업이나 확신이 없는 제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확신이 없는 물건을 진심으로 권하지 못하는 피곤한 성격의 나는 내 기술로 승부해야만 하는 장인의 일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40대의 나이에 기술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까. 나는 힘이 세지도 않고, 체력이 강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기술직이 있을까. 조용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경험에 따라 숙련도를 쌓을 수 있는, 내가 일한 만큼 실력이 쌓이는 직업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는 장인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어떤 분야의 장인이 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시계 수리였다. 하지만 스마트워치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시계 수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도 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국가유산수리기능자였다.




국가유산수리기능자는 전통기술을 바탕으로 국가유산 수리 현장에서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 기능인이다. 고궁이나 사찰의 기와를 수리하고, 목재를 다듬어 건축물을 보수하며, 돌을 쌓거나 단청을 복원하기도 한다. 국가유산을 복원하는 기술을 익힌다면 장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힘이 세지 않고, 체력이 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아보다가 단청이 눈에 들어왔다. 문화재와 사찰에서 늘 보아온 단청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기에, 그 일을 직접 한다면 어떨까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찾아보니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교육원의 국가유산수리기능인 양성과정이 있었다. 1년에 한 번만 모집하는 과정이었는데, 내가 알아봤을 때는 다음 모집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서울에도 단청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이 몇 개 있어 반가운 마음에 그중 한 군데에 연락하여 찾아가 보았다. 학원에 찾아가 단청 체험도 해보았는데, 단청은 오랜 시간 기술을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하는 예술분야라는 것이 느껴졌다. 단청 체험을 하는 동안 심장이 뛰었고, 즐거웠다. 이런 일이라면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단청 기술자가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문화재를 수리하고 보존하는 일이니, 당연히 충분한 숙련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리고 숙련이 되기 전까지의 수입은 보장되지 않는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일을 병행하며 5년 정도 버틸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단청으로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기술을 배우는 일인 만큼 전문가라고 불리기 전까지는 조수처럼 현장에서 일을 배우며 경험을 쌓아야 한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실력을 익힌 뒤에야 현장에 본격적으로 투입될 수 있기 때문에 수업도 주말에만 진행됐다. 그렇게 수년의 시간을 들여 전문가가 된 뒤에도 일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영업이 필요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청을 배우며 5년을 버틴 뒤 정말 그 기술로 먹고살 수 있다면, 나는 5년을 투자해 그 일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 막연한 5년 동안 기술자가 되기 위해 애쓰면서, 다른 직업으로 나를 먹여 살려가면서까지 내 시간과 돈을 투입할 수 있을까. 그 정도로 나는 단청에 간절할까?




과거 30대 초반, 지인들과 이런 가정을 한 적이 있었다. 모두 온라인 게임인이었기에 온라인 게임인으로서 겪는 각자의 고충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이들은 다시 수능을 준비해 의과대학이나 한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전문직 자격을 취득하는 것을 해답으로 생각했다.




“만약 지금 의과대학이나 한의과대학에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된다면, 6년 동안 공부해서 의사나 한의사가 될 수 있겠니?”




어떤 지인들은 망설임 없이 다시 대학에 들어가 전문직이 되겠다고 답했다. 만약 내게 의사나 한의사처럼 오랜 시간을 투자해 새로운 전문직이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과연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6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전문직 자격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까? 아니,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직업을 갖고 싶었더라면 아마 진작 해냈을 것이다. 누가 기회를 준다고 해서 갑자기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5년이나 6년이라는 시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원하는 일이라면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부터 계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을 배우는 동안에도 돈을 벌 수 있는지, 언제쯤 그 일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먼저 따져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살아오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아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서가 되기 위해 교육원에 가든지, 단청 장인이 되기 위해 실력을 쌓든지, 해야 한다면 어떤 부분들을 기꺼이 참아내며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견디며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한다면 나는 결국 또다시 무너질 것이다.




IT 개발자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나는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애써 무시해 왔다. 그 대가로 내 안의 뾰족한 모서리들을 갈아내야 했다. 그렇게 갈려 나간 모서리 덕분에 나는 어느 조직에서도 들어맞는 부품 같은 사람이 되어 생계를 이어올 수 있었지만, 다시는 그 모서리들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갈려 나간 것은 뾰족한 모서리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나 자신도 함께 조금씩 깎여 나간 것 같다. 지금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새로 진입해 살아간다면 행복할지, IT 개발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나는 진심으로 십수 년간 쌓아온 경력을 모두 내려놓을 만큼 IT 개발이 싫었던 것일까. 14년 동안이나 해왔던 일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도무지 답을 알 수 없게 된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40대의 나이에 새롭게 진입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어차피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면, 시간과 비용을 가장 적게 들이면서 가능하면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게 문제이다.




일정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 어떤 직업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것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아무리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데도 매달려왔던 일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그 일에는 지금까지 내가 새로운 직업을 찾으며 고민했던 것들이 적용되지 않았다. 몇 년을 해도 직업이 된다는 보장이 없고, 앞으로 얼마나 더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미 오랜 시간 그 일을 해오고 있었다. 바로 글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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