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거
유난히 더웠던 여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생의 시계가 멈춰버린 기분이 들었다. 대학생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늘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생각하며 살았다. 대학 입시가 있었고, 취업이 있었고, 진급이 있었고, 더 높은 연봉과 더 유명한 곳으로의 이직이 있었다. 늘 다음 목표가 있었고, 나는 그 목표를 하나씩 이루며 살아왔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 없이 실업자가 되고 나니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시간을 쪼개 운동을 하고, 전시회를 다니기도 하고, 틈틈이 여행을 부지런히 다녔다. 그런데 막상 회사에 가지 않는 삶이 시작되자 뭔가를 의욕 있게 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해왔던 행동들은 그 자체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회사라는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은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다녔고, 전시회는 퇴근 후나 쉬는 날에 갔다. 돌이켜보면 그것들은 내가 정말 좋아해서 했던 일이라기보다, 출근과 출근 사이의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해 했던 일들이었던 것 같다. 회사를 가지 않게 되니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해고가 결정되었지만 슬프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늘 무언가를 해야 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게 살았는데, 이제는 하루 종일 방 안에 있어도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가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이 이상했다.
실업을 앞두고서는 심리상담을 다녔었다. 고용보험에 가입된 온라인 게임인이라면 일정한 조건에 따라 온라인 게임 내 스트레스에 관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EAP(근로자지원프로그램)를 통해서였다. 나처럼 온라인 게임을 잃을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을 선생님은 해고가 결정되고 이 상황이 끝날 때까지는 스트레스가 클 것이라며, 그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라고 했다.
그런데 딱히 취미도, 다른 스트레스 해소 방법도 없었다. 회사를 다닐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혼자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스스로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풀 방법을 물었을 때도 술을 마시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술밖에 없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그럼 이 상황이 끝날 때까지는 술의 힘을 빌려보자며 회사를 나오는 날까지 음주령을 내려주셨다. 나는 그렇게 심리상담 선생님의 음주령 아래 회사를 나오는 날까지 어색하고 힘든 시간을 술과 함께 보냈다.
회사를 다니며 생길 수 있는 좋은 일이란 진급이나 인센티브, 프로젝트의 성공 같은 것이었다. 회사 밖에서 내 인생에 특별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 밖에서 이루는 성취는 회사 안에서의 성공만큼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축하할 일이 생기면 마시려고 고가의 위스키 한 병을 사두었다. 그 위스키는 언젠가 회사에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마시려고 아껴둔 것이었다. 그런데 실업자가 되고 나니 앞으로 고가의 위스키를 사서 마실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새로 술을 사느니 갖고 있던 위스키나 마셔버리자 싶었다. 그렇게 아껴두었던 비싼 위스키를 회사를 나오는 날까지 홀짝홀짝 모두 마셔버렸다. 비싼 위스키에 인생의 쓴맛이 더해지니 위스키의 맛이 특히 좋았다.
지난 14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밤에 홀짝홀짝 마시는 술 한 모금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날에는 컵라면까지 곁들였다. 늦은 밤 혼자 마시는 술 한 모금과 컵라면의 조합은 꽤 괜찮았다. 마음이 허전할수록 매운 음식도 찾았다. 이번에도 마음이 공허해지자 술을 마시며 컵라면을 먹었다. 그렇게 술과 매운 음식으로 밤을 보내며 칩거생활을 이어갔다. 이렇게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보는 것은 아마 유년 시절 이후 처음인 것 같다.
회사에 다닐 때에도 OTT나 유튜브, SNS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쏟는 것 같아 일부러 멀리했다. 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했고, 생산성이 낮은 시간을 줄이며 일에 집중했다. 일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을 아껴 쓰던 사람이 실업자가 되고 나니, 정작 남는 시간에 OTT나 유튜브, SNS를 봐도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운동을 했다. 늦게까지 야근하거나 업무 강도가 높아 체력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운동을 해왔다. 그런데 집에만 있으니 지칠 일이 없었고, 운동을 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나는 생각보다 회사 중심의 사람이었다. 회사를 목표로 많은 것을 해왔고,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에도 회사라는 이유가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가 빠진 내 삶에는 생각보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회사에 다시 출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하나를 제외하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OTT도 유튜브도 SNS도 재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할 일이 없으니 바카라을 펼쳤다. 바카라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일들을 잠시 미뤄둘 수 있었다.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도 바카라 속에 있는 동안만큼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됐다. 내 앞에 놓인 삶을 잠시 외면할 수 있었고, 당장 마주한 현실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바카라 속에 숨어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