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거
실업자가 된 후에는 집에 머물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같이 사는 부모님께도 알리지 못했는데, 말씀드리기가 두려워 재택근무를 한다는 거짓말을 했었다. 그렇지만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결국 부모님이 눈치를 채셨다. 처음에는 충격이 크셨지만, 나중에는 늘 그렇듯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받아들이셨다.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원래 독립을 해서 따로 살다가 혼자 사는 것이 도무지 버거워 다시 부모님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40대의 나이에 부모님 집에서 산다는 것이 스스로도 당당하지 않았다. 남들은 이 나이에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길러내는데, 나는 1인 가구로서 내 한 몸을 바카라임지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슬롯에서 1인분을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도 회사에 다니며 내 몫을 다하며 살아왔지만, 늘 미혼이라는 꼬리표는 나를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성인이 되면 응당 부모님 집에서 나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40대가 되어서도 부모님 그늘 아래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해야 할 숙제를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여건이 마련되면 독립을 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실업자가 되고 보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혼자 살아가는 일에는 주거비를 비롯하여 많은 고정비용이 들고, 나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라면 취업을 하면 그만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업무를 한다면, IT개발직군은 수요가 많기 때문에 일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계 때문에 새로운 온라인 게임을 구하게 된다면 나는 또다시 이전 온라인 게임에서 겪었던 문제들을 반복해서 겪게 될 것이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라 기존 인력들이 기피하던 업무 혹은 남는 업무를 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높은 난이도에서 시작할 수밖에는 없다. 경력으로 이직한 사람에게 업무 선택권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내 연차에서 사람을 뽑는다면 관리자의 역할을 기대할 것이다. 아예 관리자 직급으로 채용할 수도 있다. IT개발직군이 어느 회사나 비슷해 보이지만, 모든 회사가 다르다. 낯선 기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통솔하는 리더의 역할을 하다가 번아웃을 맞은 적도 여러 번이기 때문에 바로 지금은 IT개발 업무를 하고 싶지 않다. 지금처럼 에너지가 바닥나있을 때가 아니라 뭐든 해도 괜찮은 상태일 때 다시 뛰어들고 싶다.
수많은 IT개발자들을 봐왔다. IT개발직군이 천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IT개발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던 사람들도 있었다. 전전 온라인 게임 동료 중에는 IT가 싫어서 방과 후 코딩교사가 된 사람도 있었고, TESOL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도 있었다. IT를 떠나 귀농을 한 사람도 있었다. IT가 맞지 않는다며 IT업계를 떠났던 사람들을 만났지만, 어딜 가도 IT업계만큼은 월급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IT업계를 떠났던 사람들은 결국 다시 IT업계로 돌아왔다.
나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 나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해본다고 해서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IT업계만큼 월급을 많이 주는 곳도 없구나, IT업계야 말로 좋은 곳이었구나 하면서 되돌아올 수도 있다. 이제 나이도 40대인데, 어떻게 해야 새로운 직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 졸업을 했을 때에는 내가 회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회사가 나를 선택해서 입사하게 된 것이었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그 뒤로 이직을 했을 때에도 내가 선택을 받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과연 내가 선택한 것이 있었을까. 이력서를 낸 것은 내 의지였지만, 나를 선택한 것은 언제나 회사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그만두고 나니,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를 직접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직업에 뛰어들 것인지, 아니면 전에 하던 직무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잠시 도망을 치든지. 직업을 바꾸고 싶었다면, 회사를 다니면서 새로운 직업에 대해 준비를 했을 텐데, 갑작스러운 실업으로 인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사실은 전에 하던 직무 외에 하고 싶은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언젠가 은퇴를 할 때쯤, 아니면 최소한 10년 후쯤에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이 되면 퇴사를 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때는 새로운 직업이 없이도 금융소득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업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한 달에 빠져나가야 할 대출원리금이 고정적으로 발생한다. 높은 대출이자에 대출이자와 원리금 상환이 우선이었다.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해서 비상금도 마련해놓지 않았다. 내 인생에 이런 변수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실업은 내 인생에 가장 큰 변수가 되었다.
사실 대출금을 생각하면 하루도 쉴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며 직업을 구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지난 14년간 일을 하면서 나는 더 높은 연봉과 슬롯적으로 더 인정받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늘 지금 다니는 회사를 거쳐갈 회사라고만 생각했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이 있겠지, 지금보다 나에게 더 맞는 곳이 있겠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온전히 놓고 다닐 수 없었다. 늘 떠나갈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늘 목표하던 기업의 채용공고를 넣으며 이직을 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결국은 내가 가고 싶던 회사에 입사를 했는데, 오래 다니지 못했다. 꿈의 회사에서의 업무는 내가 하던 업무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어려웠다. 높은 연봉을 보장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는데, 내가 그 조직에서 역량을 바로 발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내 세계에서 나는 늘 1인분 이상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꿈의 회사에서는 1인분도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IT업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두렵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한번뿐인 인생 지금은 IT업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가 없다. 이제 나에게는 무한의 선택이 주어졌는데, 막상 선택하려고 보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온라인 게임을 다니면서 다른 일에 대한 탐구도 하고, 경험도 쌓았어야 했는데, 그런 활동들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첫 온라인 게임부터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 준 회사에 입사한 것이었다. 나는 IT개발 외에 다른 직업 탐색을 언젠가 하려고 했는데 실업이 먼저 찾아왔다. 지금까지 늘 발 밑에는 길이 깔려있었는데, 어느 순간 길이 뚝 끊겨버렸다. 갑자기 삶이 일시정지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