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을 납득시키며 살아간다.
오늘 문득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보다, 알고도 설명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고.
예를 들어, 약속 시간에 늦었다.
“내가 늦었네.” 여기까지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다음 말이 따라온다.
“근데 오늘 차가 너무 막혔어.”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원래 이렇게 늦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늦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굳이 이유를 붙인다.
실수를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런 일을 꽤 자주 한다. 괜히 화를 냈을 때도 그렇다.
“내가 좀 예민했나 봐.”라고 말하면서도 곧이어 덧붙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먼저 그렇게 말했잖아.”
일을 미뤄놓고도, “내가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니야. 요즘 너무 바빴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놓고,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닌데, 그때 상황이 좀 그랬어.”
이렇게 말한다.
뭔가 이상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고, 우리는 그 잘못에 설명을 붙인다.
왜 그럴까.
사람은 자신의 행동보다 그 행동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이게 할지를 더 신경 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유 하나가 붙으면 모양이 조금 달라진다.
실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실수가 나의 전부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에게 이유를 붙이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실수에 관대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사람을 보면 가끔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은 실수 하나를 며칠씩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잘하는데 나는 왜 못할까 하면서 자신을 계속 몰아붙인다.
누군가가 같은 실수를 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그 말을 못한다. 또,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일이 더 나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반성이 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조금 편안하게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수했을 때 이유를 찾고, 잘못했을 때 상황을 떠올리고,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한다.
마치 마음속에 작은 완충장치를 하나 두는 것처럼.
‘괜찮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면서 조금씩 불편한 마음에서 빠져나온다.
물론 모든 자기 정당화가 좋은 것은 아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속이는 것은 아주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 라는 말이 되면 조금 달라진다.
앞의 질문은 나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뒤의 말은 바카라임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냐, 엄격하냐가 아닌 것 같다.
어디까지 나를 이해하고, 어디에서 멈추느냐.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
차가 막혀서 늦었을 수도 있고, 정말 힘든 하루를 보내서 예민했을 수도 있다.
또, 그 사람의 말이 나를 화나게 했을 수도 있으며, 그게 사실일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늦지 않은 것도, 화를 내지 않은 것도 아니며, 잘못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정은 잘못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조금 더 정확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볼 때는 참 간단하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저 사람은 시간 개념이 없나?’
일을 미루면 ‘저 사람은 바카라임감이 부족한가?’
화를 내면 ‘성격이 왜 저래?’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같은 행동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왜 늦었는지 알고 있고, 왜 일을 미뤘는지도 알고 있으며, 왜 화를 냈는지까지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과만 보이지만 나에게는 그 결과까지 오는 과정이 전부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더 많은 설명을 붙이게 되고, 사람은 자신을 이해할 때는 변호사가 되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변호사는 꽤 성실하다.
잘못한 이유를 찾아주고, 힘들었던 상황을 설명해주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이야기해준다.
가끔은 지나치게 열심히 변호해서 판결까지 바꾸려고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신을 변호하는 이유가 꼭 나를 속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 같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서는 도망칠 수 없다.
실수할 때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형편없는 사람인가.’
자신을 몰아붙인다면 하루하루가 버거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자신을 납득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수 있을만큼 자신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 정당화는 본능에 가까운 걸까.
아마 우리가 사용하는 구체적인 변명들은 살아가면서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하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다.
어린아이도 잘못을 하면 말한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걔가 먼저 그랬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신을 설명할 이유부터 찾는다.
어쩌면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이 한 행동과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한 것’과 ‘내가 잘못된 사람인 것’은 다르다고.
그 차이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누군가가 변명을 할 때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물론, 바카라임을 피하려는 변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도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려는 중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그때의 나는 이런 상황에 있었어.’ 라고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나도 실수를 하면 이유를 찾고, 선택을 설명하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를 납득시킨다. 그래서, 그 과정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나를 너무 쉽게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나를 너무 오래 벌주면서 살아갈 필요도 없으니까.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얼마나 엄격하게 판단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면서도 바카라임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과 잘못이 없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니까.
사람은 오늘도 자신에게 이유를 붙인다.
그것은 변명이라기보다 내일도 나를 데리고 살아가기 위한 작은 설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