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출발, 쉽지 않았다

자격증이 많으면 무엇하나?

by청순일기

코로나로 모든 것이 정지되었던 시절, 남편과 내가 다니던 항공회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하늘 문이 닫히는 기상천외의 일이 벌어져 수십 대의 비행기가 오르내리던 공항은 점점 폐건물처럼 을씨년스러워졌다가 기어이 폐쇄되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재앙 중 하나로 꼽히는 14세기의 흑사병은 유럽을 휩쓸었지만, 신종 바이러스인 코로나 19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하늘길이 차단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비행기가 뜰 수 없으니, 항공사 직원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강제 휴가에 들어갔다. 하루 2명의 직원만 교대로 출근하여 휑한 공항의 빈 사무실을 지켰다. 남편은 휴가를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기약없는 휴가가 끝난다 해도 회사의 상황이 나빠질 것은 뻔한 일이었고, 나이 많은 관리직들이 정리 대상이 되리라는 불안한 예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경우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재주가 없는 남편은 이것저것 배우러 다녔고 자격증을 하나씩 취득했다. 그는 나이 들어 찾는 새로운 일자리에 조금의 환상도 갖지 않았다. 양복 입고 출근하면서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 사람들에게 대우받는 지금까지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회사에 일본어를 아주 고급스럽게 구사하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퇴직하면 일본어 강사나 번역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으나, 막상 퇴직 후에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나이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들 중에도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 번듯한 자리에 굳이 나이 든 사람을 쓸 이유가 없었다.




남편은 몸으로 하는 기술을 익혔다.


일자리를 찾는 중년 남자들이 가장 많이 배운다는 지게차부터, 포크레인, 로더, 수상 보트, 화물차, 트레일러, 버스, 택시의 운전 자격증을 차례로 땄다. 심지어 한식과 양식 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하였다. 취업이 안 될 경우 국수가게라도 차릴 생각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긴 휴가 동안 남편은 배우러 다니고, 시험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나라에서 주는 내일 배움 카드를 아주 알차게 사용하였다


다행히 지긋지긋하던 코로나 비상사태는 종료되었고, 비행기가 다시 하늘을 날았다.

우리는 항공사 업무로 복귀하여 무사히 정년퇴직하였다.

퇴직 후, 남편은 그 많은 자격증 중 하나는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실업 급여를 받는 9개월 동안 그는 평생 처음 일 안 하고 놀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온 사람이었다. 36년 동안 회사에 근무하면서 젊을 때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결혼 후에는 처자식을 돌봐야 하는 가장이었다.




큰 재산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남편이나 나나 남의 돈 쓰는 것을 무서워하여, 퇴직할 때 대출이나 빚은 없었다. 아이들은 독립하여 제 밥벌이를 하고, 집이 있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연금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돈 들어가는 곳이 많았다. 월급날이면 돈은 통장에 잠시 찍혔다가 바로 공중분해되곤 했다. 힘들때는 기껏 들었던 보험이나 적금을 중도해지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국민 연금은 해지가 안되는 것이어서 월급이 차압되어도 연금은 부어야했다. 30년 넘게 월급에서 꼬박꼬박 떼어가는 국민연금을 원망스럽게 보기도 했으나, 퇴직하고 나니 꼬박꼬박 나오는 연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가지고 있는 재산보다 연금이 주는 든든함이 크다.


아들은 국민연금을 불신하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아 노동 인구는 점점 줄어드는데 노인 인구는 점점 늘어가니, 우리 세대처럼 연금의 혜택을 받기는 어렵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노인이 되어서의 세월은 더욱 길어질테니, 어떤 식으로든 노후에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게끔 해야한다. 안타깝게도 AI가 발달하면서 고급 인력도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시대, 노후까지 고민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바카라도 있듯이 젊음은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시기이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가정의 질문이 싫다. 부끄러웠던 순간도 많았고 후회되는 일도 많아서 젊은 시절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프고 부끄러웠던 시간을 거치면서 조금씩 사람꼴을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시간을 보내든, 그 시간은 내 삶에 자국을 남긴다. 카페에 가면 노트북을 펴놓고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젊은 친구들을 많이 본다. 수그린 그네들의 등이 짠하면서 그만큼의 자국을 남길수 있기를 응원하곤 한다.




나이 든 부부는 쓸 돈이 그리 많이 필요치않다. 호의호식을 원하는 것도 아니니 남편이 일을 하지않아도 단촐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퇴직 후의 자유로운 생활이 감사한 만큼 남편도 여유있는 시간을 만끽하길 바랬다.

하지만 남편은 실업 급여 받는 기간 동안 일없이 집에 있는 것을 힘들어했다. 활동하며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남자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한 사람이다.


드디어 실업 급여가 끝나갈 무렵, 그는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무려 29군데의 회사에.

그중에는 중장비회사, 식품회사도 있었고, 인천공항 공사, 항공사 위탁사도 있었다. 그의 항공사 경력이 딱 들어맞는 업무로 사람을 뽑는 자리도 있어서 내심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정말 야속하게도 단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이메일을 수시로 확인하고 실망하고의 연속이었다.


그 많은 자격증이 무용지물이었다.

자격증만 있고 현장 경험이 없는 나이 든 사람을 고용해 주는 회사는 없었다. 경험이 있는 항공사 관련 일자리는 나이든 사람에게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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