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원한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은 같은가

7장 「간절히 나아온 부자 청년을 도전하시다」

by신아르케

《주님 없는 복음》을 계속 읽다 보면 맥아더 목사님이 반복해서 붙들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 보인다.

구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는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니고데모가 나온다. 사마리아 여인이 나온다. 세리 마태가 나온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자 청년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은 모두 다르다.

종교적 배경도 다르고, 슬롯적 위치도 다르고, 도덕적 상태도 다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실 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신다.

니고데모에게는 자기 의를 건드리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숨기고 싶었던 삶을 드러내셨다. 세리 마태에게는 세관을 떠나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고,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는 육체의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을 건드리셨다.

나는 이 장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구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에 등록하는 것인가.

세례를 받는 것인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인가.

물론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맥아더가 계속해서 묻는 질문은 그보다 깊다.

그리스도는 정말 나의 주님이신가.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매우 진지하게 찾아왔다.

그는 건성으로 찾아온 사람이 아니다.

달려왔고, 무릎을 꿇었으며, 영생을 물었다.

그리고 슬롯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젊었고, 재산도 많았으며,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도덕적으로도 자신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말씀하시자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그는 방탕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던 사람도 아니었고, 세리처럼 슬롯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는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무엇인가 부족했다.

겉으로는 거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들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이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사람은 많은 것을 얻고도 계속 묻는다.

이것이면 충분할까.

조금 더 가지면 행복해질까.

조금 더 성공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조금 더 인정받으면 나의 존재가 단단해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은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원한다.

마치 밑이 뚫린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 같다.

돈도 들어간다. 성공도 들어간다. 사람들의 인정도 들어간다. 좋은 집도, 좋은 차도, 좋은 경력도 들어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묻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정말 괜찮은가.”

부자 청년도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영생을 원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그는 영생을 원한 것인가, 아니면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원한 것인가.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곧바로

“나를 믿으면 된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계명을 말씀하셨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 청년의 가장 큰 문제를 본다.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죄인이라기보다 꽤 잘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지점은 니고데모와 닮아 있다.

죄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행동을 생각한다.

살인, 간음, 도둑질, 사기, 폭력.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깊이를 훨씬 더 안쪽까지 밀고 들어가셨다.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 미움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음욕이 깨끗한 것도 아니다.

겉으로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의 동기까지 언제나 순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행동만 검사하지 않는다.

마음까지 검사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늘 불편해진다.

행동만 보면 나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 강도질도 하지 않았다. 큰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음까지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질투가 있다. 미움이 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타인의 실패를 보며 은근히 안도할 때도 있다. 돈을 사랑하고, 편안함을 사랑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며, 나보다 잘되는 사람을 불편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나는 꽤 잘 지켰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율법은 나를 구원하는 사다리라기보다 내 얼굴의 얼룩을 보여주는 거울에 가깝다.

거울이 얼굴을 씻어주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씻어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청년은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깊이 들어가신다.

그의 마음에서 가장 민감한 곳을 정확히 건드리신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읽을 때마다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나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고 하신다면.

내가 평생 모아온 재산을 내려놓으라고 하신다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하신다면.

나는 정말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본문을 읽으면 두 가지 극단으로 가기 쉽다.

한쪽에서는 말한다.

“모든 신자는 실제로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

다른 쪽에서는 말한다.

“그 말씀은 그냥 상징적인 말이니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둘 다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실제로 재물을 내려놓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명령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주어지는 구원의 공식도 아니다.

핵심은 재산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였다.

그 청년에게 재물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의 안전이었고, 정체성이었고, 자부심이었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곳을 건드리셨다.

나는 여기서 우상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상이라고 하면 흔히 종교적인 조각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훨씬 세련된 우상이 많다.

돈, 자녀, 성공, 명예, 사람의 인정, 건강, 쾌락, 안정, 자기 통제권.

심지어 신앙생활 자체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다.

그것이 나를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다.

돈을 가진 사람과 돈에게 붙잡힌 사람은 다르다.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과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사람도 다르다.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성공하지 못하면 내 존재 전체가 무너지는 것도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결국 이것처럼 들린다.

“내가 그것보다 더 귀하냐.”

이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도 떠올렸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

이삭은 단순히 사랑하는 아들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존재였고, 아브라함의 미래였으며, 그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신다.

그리고 묻는 것 같다.

“약속보다 약속을 주신 나를 더 신뢰할 수 있느냐.”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실제로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순종이 마음속 생각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모리아산에 올라갔다.

이삭을 데리고 갔고, 제단을 만들었으며, 칼을 들었다.

즉 마음의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만 보시니까 실제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동시에

“내가 무언가를 완벽하게 포기해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긴장이 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신다면 나는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붙잡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한동안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가.

이 질문에서 나는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완벽한 순종과 순종하려는 방향은 같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자기 욕망과 싸운다.

돈을 붙잡고, 사람들의 인정을 원하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며, 하나님보다 내 계획을 앞세울 때도 있다.

그러나 참된 믿음 안에는 한 가지 변화가 생긴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주님보다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정당화하기보다 내려놓기를 원하게 된다.

비록 지금 당장 완벽하게 내려놓지 못해도 기도한다.

“주님, 이것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저를 바꾸어 주십시오.”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주재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는 이제 모든 영역에서 완벽하게 순종합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주님께서 내 삶의 어느 영역에도 들어오실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에 더 가깝다.

내 돈도, 내 가족도, 내 시간도, 내 몸도, 내 미래도, 내 명예도, 내 꿈도 궁극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 삶에서는 계속 실패한다.

그러나 방향은 달라진다.

이전에는 내 것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다면, 이제는 점점 묻게 된다.

“주님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기 원하실까.”

이것이 성화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방을 하나씩 여시는 것이다.

나는 한 방을 열어드리고, 다른 방은 잠가 놓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 그 문 앞에 서신다.

“여기도 내게 줄 수 있겠느냐.”

나는 다시 망설인다.

그리고 조금씩 열어간다.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점점 분명해진다.

부자 청년은 결국 근심하며 돌아갔다.

이 장면이 참 슬프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그를 모욕하지 않으셨다.

억지로 붙잡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의 마음을 정확히 보여주셨다.

청년은 영생을 원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성경은 그 이후 그의 삶을 말하지 않는다.

그날의 충격이 훗날 그를 회개로 이끌었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도보다 재물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 이야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나 역시 얼마든지 그 청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영생을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도 원한다.

평안도 원하고, 천국도 원하고, 기도 응답도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가장 깊은 욕망을 건드리실 때도 그분을 원하는가.

이 질문은 훨씬 어렵다.

나는 이번 장을 읽으면서 현대의 복음 전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쉽게 만들려는 유혹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당신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한 심리치료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공허함을 채우는 하나의 도구로 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래서 복음은 위로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흔든다.

용서하면서 동시에 회개를 요구한다.

생명을 주면서 동시에 우리의 우상을 무너뜨린다.

듣기 좋은 말만으로는 복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십자가가 위로이면서 동시에 죽음인 것처럼, 구원은 선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의 주인이 바뀌는 사건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은혜를 놓치면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읽다 보면 자칫 신앙이 또 하나의 무거운 시험지가 될 수 있다.

“나는 충분히 내려놓았나.”

“나는 정말 주재권을 인정하고 있나.”

“나는 재물을 포기할 수 있나.”

“나는 정말 구원받았나.”

계속 자기 자신을 검사하다 보면 결국 구원의 근거가 또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내가 얼마나 잘 내려놓았는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이다.

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내려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

나는 주님을 완벽하게 사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필요하다.

나는 계속 내 마음의 보좌로 올라가려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끊임없이 나를 다시 내려오게 하셔야 한다.

결국 부자 청년 이야기는 나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하나는,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자리에 무엇도 두어서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내 힘으로 완벽하게 이루어 낼 수 없는 나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이 두 진리는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복음을 만든다.

은혜는 순종을 없애지 않는다.

순종은 은혜를 대신하지 않는다.

은혜가 먼저이고, 그 은혜가 삶의 방향을 바꾼다.

그래서 이번 장을 읽고 나에게 남는 질문은 하나다.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보다 더 깊은 질문.

“내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어쩌면 내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영생을 원하는가, 아니면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원하는가.”

부자 청년은 영생을 원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리스도 자신보다 재물이 더 소중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다시 기도할 뿐이다.

주님,

제가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보게 하소서.

제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 주소서.

그리고 그것을 당장 완벽하게 내려놓지 못하는 저를 정죄 가운데 버려두지 마시고,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주소서.

제가 구원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붙들렸기 때문에 조금씩 손을 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영생만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생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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