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하던 자가 보게 되다

6장 「맹인의 육적 눈과 영적 눈을 여시다」

by신아르케

주님 없는 복음을 계속 읽으면서 반복해서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 있다.

구원받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내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는 것까지 포함하는가.

맥아더가 주장하는 주재권 구원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주재권이 무엇인지, 제자도가 무엇인지 모두 이해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내가 이 바카라을 읽으며 이해한 맥아더의 주장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받기 위해 복잡한 신학 체계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구원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신학적 성취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다.

문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받아들이면서 주님으로는 거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을

“나를 지옥에서 건져 주시는 분”

으로는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가.

맥아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구주이시면서 동시에 주님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믿음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방향이 생긴다.

이제 내 삶은 궁극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와 싸운다.

넘어지고, 다시 자기 욕망에 끌리고,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것이 하나 생긴다.

방향이다.

이전에는 내 욕망이 삶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뜻을 알고 싶어진다.

이전에는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죄와 싸우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도 불편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나는 이것이 맥아더가 말하는 주재권의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행위가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방향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9장의 맹인은 이 사실을 아주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먼저

“예수님, 저를 고쳐주십시오.”

라고 외친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보셨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구원의 시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내가 하나님을 찾아갔다고 생각한다.

내가 교회를 선택했고,

내가 성경을 읽었고,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의 선택과 반응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읽다 보면 그보다 먼저 있었던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해 오고 계셨다.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다.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건이다.

요한복음 9장의 맹인도 그렇다.

그는 보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볼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먼저 다가오셨다.

예수님은 침으로 진흙을 만들어 그의 눈에 바르셨다.

현대인의 눈에는 상당히 낯선 방법이다.

왜 하필 침이고, 왜 진흙이며, 왜 그런 방식이어야 했는지 모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방법의 과학성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분의 권위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갔다.

씻었다.

보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믿음의 한 모습을 본다.

그 맹인은 예수님의 치료 방식에 대한 논문을 읽지 않았다.

진흙의 성분을 분석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의 신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반응했다.

물론 그의 순종이 기적의 대가를 지불한 것은 아니다.

그가 실로암까지 걸어갔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눈을 뜬 것도 아니다.

눈을 뜨게 한 능력은 예수님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믿고 움직였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을 구원의 정확한 공식이라기보다, 믿음에는 신뢰의 반응이 따른다는 그림처럼 보게 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란다.

“저 사람이 정말 전에 구걸하던 맹인인가.”

어떤 사람은 맞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닮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

“내가 그 사람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냐고 묻는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신성을 정교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한다.

나는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이 내 눈에 진흙을 발랐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했다.

나는 가서 씻었다.

그리고 지금 본다.

이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본다.

구원받기 위해 먼저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첫 순간에 모든 교리를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길은 평생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보다 누구를 믿고 있는가이다.

그런데 이 맹인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멈춰 있지 않는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사람”

정도로 말한다.

조금 뒤에는 그를

“선지자”

라고 한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깊어질수록 그의 고백 역시 깊어진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결국 예수님이 다시 그를 찾아오신다.

그는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순간,

예수님께서 다시 그를 찾아오셨다.

나는 이 장면이 참 아름답다.

세상이 그를 밀어냈을 때 그리스도는 그에게 가까이 오셨다.

사람들은 그를 쫓아냈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내셨다.

그리고 묻는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묻는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밝히신다.

그때 그는 고백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경배한다.

여기에서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다.

첫 번째 기적은 육체의 눈이 열린 것이다.

두 번째 기적은 영적인 눈이 열린 것이다.

나는 오히려 두 번째 기적이 더 크다고 느낀다.

육체의 눈이 열려 세상을 보게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기적이다.

여기에서 바리새인들과 맹인의 극명한 대비가 나타난다.

맹인은 처음에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점점 보게 된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성경도 알고 있었다.

율법도 알고 있었다.

안식일 규정도 잘 알고 있었다.

맹인의 부모까지 불러 사실관계를 조사했다.

증거도 확인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아이러니하다.

정보는 많아지는데 진리는 더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문제는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방향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실을 보고 결론을 내리려 한 것이 아니라,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그 결론을 지켜줄 증거를 찾았다.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다.”

이 결론을 먼저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맹인이 눈을 뜬 사실도,

부모의 증언도,

눈앞의 결과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안식일 문제를 붙들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흙을 만들고 사람을 고쳤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완고함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자신의 세계관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인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이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할수록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적으로 눈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보지 못했다.

반대로 맹인이었던 사람은 육체의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열렸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무겁게 다가온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

여기서 가장 두려운 상태는 무엇일까.

나는 보지 못하면서도 보고 있다고 확신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길을 잃은 사람이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라고 인정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면서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고 확신한다면 누군가가 아무리 길을 알려줘도 듣지 않을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 예수님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장을 읽으면서 나는 신학 지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신학 지식 자체가 사람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는 것은 아니다.

신학 지식은 빛과 비슷하다.

방 안에 빛을 아무리 밝게 켜도 눈이 감겨 있다면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시면 그 빛을 통해 많은 것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신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빛을 원한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분을 더 알고 싶어진다.

성경을 배우고,

교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복음의 깊이를 알아가는 이유가 달라진다.

구원받기 위해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구원하신 분을 더 사랑하고 더 바르게 알고 싶어서 배우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베드로의 고백도 떠올린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베드로의 탁월한 추론의 결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도 진실하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참된 믿음에는 신비가 있다.

나는 믿는다.

내가 고백한다.

내가 순종한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모든 것 뒤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눈을 열어주셨고,

그리스도를 보게 하셨으며,

믿을 마음을 주셨다.

그렇다고 인간의 반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맹인은 실로암으로 갔다.

씻었다.

바리새인들 앞에서 증언했다.

출교의 위험도 감수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경배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반응이 함께 나타난다.

나는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두 가지를 모두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신다.

그리고 눈이 열린 사람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그리고 새로워진 사람은 믿고 따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주재권과 구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그분을 주님으로 보게 된 사람이라면 그분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지 않을까.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순종하다 실패하고 다시 회개한다.

그러나 삶의 방향만큼은 달라진다.

그 사람의 눈에 이제 주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9장의 맹인은 결국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그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단순히 세상을 보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이유로 내가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원한다.

신앙생활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이미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원한다.

오히려 매일 기도하고 싶다.

주님,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지식은 많아지는데 믿음은 굳어지지 않게 하시고,

교리는 쌓여가는데 마음은 차가워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내가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은

내 눈이 밝아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그 사람이 마침내 주님을 보며 고백했던 것처럼,

나도 매일 다시 고백하고 싶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그 고백이 입술에서 끝나지 않고,

나의 생각과 선택과 삶의 방향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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