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먼저 찾아오시고, 삶을 바꾸시는 주님

8장 죄인을 먼저 찾으시고 완전히 바꾸시다

by신아르케

《주님 없는 복음》 8장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느낀 것이 있다.


예수님은 완성된 사람을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을 이미 잘 다듬은 사람, 죄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사람, 슬롯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을 골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분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신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정말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될 만큼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복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 막힌다.


왜냐하면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길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음의 시작에는 반드시 이런 고백이 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나는 내 행위와 도덕성과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이 고백이 없으면 은혜는 단순한 종교적 장식이 되고 만다.


나는 이 점에서 부자 청년과 삭개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생각한다.


부자 청년은 슬롯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젊었고, 돈이 많았고, 도덕적으로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자신이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바로 자기 의였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보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삭개오는 달랐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당시 유대 슬롯에서 세리는 단순히 인기 없는 직업 정도가 아니었다.


로마의 세금을 걷고, 그 과정에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슬롯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삭개오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여겨지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슬롯적으로도 이미 죄인의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세상적으로 명백한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더 열려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죄가 많아서 유리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환자가 의사를 찾기 더 쉬운 것처럼,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 쉽게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도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나는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합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자기 자신을 높이는 보고서에 가깝다.


반면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그는 자기에게 의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부자 청년과 바리새인은 닮아 있다.


둘 다 자신이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삭개오와 성전에 올라간 세리 역시 닮아 있다.


둘 다 슬롯적으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복음서가 보여주는 것은 슬롯적 평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이다.


자기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은혜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구원자의 필요를 깨닫는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것조차 결국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먼저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다.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여신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인간이 반응한다.


나는 삭개오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을 아름답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았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다.


키가 작아 군중 때문에 볼 수 없자 나무에 올라갔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깊이 보면,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를 찾고 계셨다.


예수님은 나무 아래를 지나가시다가 멈추신다.


그리고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장면은 참 놀랍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하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추셨다.


삭개오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그는 구경꾼으로 시작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만나게 하셨다.


나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찾았다.


내가 교회를 선택했다.


내가 성경을 읽었다.


내가 믿기로 결단했다.


물론 우리의 선택과 반응은 실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보면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주님을 찾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주님이 나를 먼저 찾고 계셨다.


삭개오도 그랬을 것이다.


그가 나무에 올라간 순간조차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안에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 삭개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난다.


삭개오는 말한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그리고 누구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여기서 나는 7장의 부자 청년을 다시 떠올린다.


둘 다 부자였다.


둘 다 예수님 앞에 섰다.


그러나 방향은 완전히 달랐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영생을 물었다.


하지만 재물을 내려놓으라는 말씀 앞에서 근심하며 떠났다.


삭개오는 오히려 예수님을 영접한 뒤 스스로 재물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붙들기 위해 예수님에게서 떠났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붙들면서 재물을 놓기 시작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었다.


문제는 돈의 위치였다.


돈이 손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의 왕좌에 있는가.


부자 청년에게 재물은 포기할 수 없는 주인이었다.


삭개오에게도 돈은 오랫동안 삶을 지배했던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 자리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죄를 깨닫는 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그 죄를 슬퍼한다.


마지막으로 방향을 돌린다.


삭개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지갑이 움직였다.


그의 인간관계가 움직였다.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누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가 네 배로 갚겠다고 했기 때문에 구원을 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순서는 반대다.


은혜가 먼저였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셨다.


예수님이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님이 먼저 그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은혜가 삭개오의 마음을 바꾸었다.


마음이 바뀌자 돈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므로 삭개오의 나눔과 배상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다.


나무가 열매를 맺어서 살아 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행위가 구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이것이 맥아더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은혜가 진짜라면 삶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는 없다.


생각이 달라지고,


욕망이 달라지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돈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완벽하게 한순간에 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넘어지고 실패한다.


그러나 분명히 방향은 달라진다.


나는 여기서 말씀의 역할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말씀은 거울과 같다.


어두운 방에서는 옷에 묻은 먼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햇빛 아래로 나가면 먼지가 갑자기 많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빛이 먼지를 만든 것이 아니다.


원래 있던 먼지를 보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말씀 앞에 세우시면 그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얼마나 교만한지, 얼마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돈과 안전과 사람의 평가를 의지하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 죄인을 찾아오시는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깨끗해지고 나면 나에게 오라.”


고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죄인에게 먼저 찾아오신다.


삭개오에게도 먼저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 은혜 속에서 삭개오는 바뀌기 시작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변화시킨 뒤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먼저 찾아오셔서 변화시키시는 분이다.


나는 이 사실이 참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완전해져야 한다면 나는 주님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다 정리한 뒤,


내 욕망을 다 버린 뒤,


내 죄를 다 고친 뒤,


완벽하게 회개한 뒤에야 주님께 갈 수 있다면 나는 평생 주님께 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먼저 찾아오신다.


그리고 나의 죄를 보게 하신다.


회개하게 하신다.


돌이키게 하신다.


조금씩 삶을 바꾸어 가신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도하게 된다.


주님,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소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나를 의롭다 여기지 않게 하소서.


말씀의 빛 앞에서 제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제 안의 교만과 욕망과 탐심과 자기 의를 보게 하소서.


그리고 그 죄를 보는 데서 멈추지 말게 하소서.


삭개오처럼 주님을 기쁘게 영접하고,


그 만남이 내 삶의 실제 변화로 이어지게 하소서.


제가 변했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에 제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소서.


행위로 구원을 사려 하지 않게 하시고,


은혜를 핑계로 변화 없는 삶에 머물지도 않게 하소서.


은혜가 먼저이고,


변화는 그 은혜의 열매라는 사실을 붙들게 하소서.


그리고 언젠가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내가 주님을 찾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주님이 먼저 나를 찾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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