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원하는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원하는가

9장 「제자 같은 거짓 제자에게 경고하시다」

by신아르케

《주님 없는 복음》 9장을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번 장에서 맥아더 목사님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교회에 다니는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가.

입으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가.

이런 질문을 넘어서 더 깊은 곳을 찌른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원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것인가.

맥아더 목사님은 일관되게 주재권의 문제를 강조한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내 삶의 주님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지만 이후의 삶에서는 그분의 말씀과 아무 상관 없이 살아도 되는가.

심지어 지속적으로 믿음에서 떠나고, 회개도 없고, 삶의 방향에도 아무 변화가 없어도 한때 했던 고백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맥아더는 여기에 강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도도 넘어질 수 있다.

죄를 짓기도 하고, 한동안 육신적인 욕망에 끌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아무 회개와 변화 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정상적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그 가장 무서운 예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다.

유다는 멀리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약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녔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

산상수훈과 수많은 비유를 들었다.

병자가 고침받는 것을 보았고,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보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도 접했을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보았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능도 보았다.

그는 심지어 제자들과 함께 전도 사역에 참여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면 교회 출석 정도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역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이 사실은 참 무섭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말씀을 사랑했던 것도 아니었다.

사역에 참여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의 마음이 주님께 속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성경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고, 그 돈을 훔치기도 했다고 기록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 안에 있었다.

그의 배신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사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탐욕과 불신앙이 결국 마지막 순간에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겼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

지식과 믿음은 같지 않다.

교회생활과 구원도 동일하지 않다.

신앙의 언어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역시 같은 것이 아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생명의 주인으로 믿고 의지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통해 얻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면 새로운 나라가 시작될 것이고, 자신도 그 나라 안에서 어떤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은 유다가 정확히 어떤 정치적 계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는지까지 상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동기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있다.

그의 마음에는 탐욕과 불신앙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선택했다.

나는 이 모습에서 오늘날의 신앙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 예수님께 많은 것을 기대한다.

마음의 평안.

건강.

가정의 행복.

사업의 성공.

자녀의 형통.

경제적인 안정.

사람들의 인정.

물론 하나님께 이런 것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문제는 이것들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해질 때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신앙의 중심이 뒤집힌다.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가장 깊은 위험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실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내가 가진 돈과 능력과 도움 때문에 나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자 그 사람이 나를 떠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과연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랑한 것이다.

신앙도 그럴 수 있다.

주님이 내 삶을 잘 풀어주실 때는 믿는다.

기도가 응답될 때는 감사한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자녀가 잘될 때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황이 바뀐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삶이 힘들어진다.

하나님의 뜻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다.

그때도 나는 예수님을 원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내 믿음의 동기가 드러날 수 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에게서 떠났다.

예수님은 그의 배신을 알고 계셨다.

최후의 만찬에서도 배신자가 있음을 드러내셨다.

유다에게 떡 조각을 주신 뒤에는 그가 하려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유다는 진리 바로 옆에 있었다.

생명 바로 옆에 있었다.

은혜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런데 끝내 그 생명을 붙들지 않았다.

이것이 거짓 제자의 가장 무서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잃을 수 있다는 것.

유다는 결국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다.

은 삼십을 돌려주었다.

자신이 죄 없는 피를 팔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후회는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베드로를 떠올리게 된다.

베드로도 처참하게 실패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 역시 주님께 충성을 맹세했던 제자였다.

“모두 주님을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위험이 닥치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는 베드로의 실패도 엄청나다.

그러나 베드로와 유다의 길은 그 이후 갈라진다.

유다는 자신의 죄를 보고 절망으로 갔다.

베드로는 통곡했다.

그리고 결국 주님께 돌아왔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다시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완벽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충동적이었고, 두려워했고, 넘어졌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렵게 여기고 떠날 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나는 이 고백이 참된 제자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순간 완벽하게 순종했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이후에도 크게 실패한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알았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갈 곳이 없다.

참된 믿음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결국 다시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

모든 말씀을 즉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그분이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는 것.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만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내 욕망과 충돌할 때에도 주님을 버리지 않는 것.

그래서 주재권의 문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주님의 주재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매 순간 완벽하게 순종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도 탈락했을 것이다.

다윗도 탈락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탈락할 것이다.

주재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 삶의 최종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넘어질 수 있다.

도망칠 수도 있다.

때로는 주님의 뜻보다 내 욕심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옳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죄를 정당화하면서

“주님은 이 부분에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뒤 다시 돌아온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참된 제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돌아오는 사람이다.

반면 거짓 제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예수님께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가까이 간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으시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라가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자신을 따라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모순적인가.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내가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주님, 저를 따라오십시오.”

“제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한다.

화가 난다.

심지어 믿음을 떠난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왕좌에서 내가 아직 내려오지 않은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악한 배신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인가.

마음이 평안해지기 위해서인가.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인가.

자녀가 잘되기 위해서인가.

죽음이 두려워서인가.

물론 이런 이유들이 신앙을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신앙은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

예수님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원하는 자리.

그분이 아무것도 주지 않으셔도 그분이 가장 귀한 자리.

내가 원하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셔도 그분을 신뢰하는 자리.

이것이 내가 배우고 싶은 믿음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내 힘을 신뢰할 수 없다.

“나는 절대 유다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베드로도 자신했다가 무너졌다.

그래서 더욱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붙들어 주셔야 한다.

내 마음속에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드러내 주셔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게 하셔야 한다.

결국 참된 제자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나 그 은혜는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

넘어졌을 때 다시 주님께 돌아가게 한다.

그리스도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이번 장을 읽으며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만약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복을 하나도 주지 않으신다면, 그래도 나는 주님을 원하는가.

건강이 흔들려도.

돈을 잃어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내 계획이 무너져도.

기도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아도.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나는 쉽게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주님,

제가 주님보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더 사랑하지 않게 하소서.

복보다 복을 주시는 분을 사랑하게 하시고,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을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넘어질 때 유다처럼 절망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다시 주님께 돌아오게 하소서.

말씀이 어렵고 불편하다고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내 욕망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제 욕망을 주님 위에 올려놓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매일 다시 고백하게 하소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