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죄인은 영접하고 의인은 거절하시다」를 읽으며
《주님 없는 복음》 5장을 읽으며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정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기독교인에게 이 질문은 너무 익숙하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기도할 때마다 용서를 구하며,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수없이 듣는다.
그런데 익숙한 고백은 때때로 위험하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말을 너무 자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은 마음을 찌르는 고백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문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십일조와 헌금에도 성실하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공부한다.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비교적 온순하게 살아간다.
가끔 선행도 하고 어려운 사람도 돕는다.
그런 삶이 오랫동안 쌓이면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릴 수 있다.
“그래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신앙은 아주 미묘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저 사람보다 나는 더 성실하고,
저 사람보다는 도덕적이며,
저 사람보다는 신앙생활도 잘하고,
저 사람보다는 죄를 덜 짓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비교하기 시작하면 자기 의가 자라난다.
자기 의는 아주 교묘하다.
노골적으로
“나는 의롭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이라는 옷을 입고 찾아온다.
“나는 예배도 열심히 드리잖아.”
“나는 성경도 많이 읽잖아.”
“나는 적어도 저 사람처럼 살지는 않았잖아.”
그런 생각들이 조금씩 쌓이면 어느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흐릿해진다.
아마 이것이 바리새인의 가장 깊은 문제였을 것이다.
그들이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율법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신한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어느 순간 자신의 의로 계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성적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복음은 훨씬 불편한 자리에서 시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
나는 이 사실을 매일 다시 기억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내가 인간적으로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양심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는 나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 만큼 충분한 의가 없다.
내 선행을 아무리 모아도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복음은 필요 없는 이야기가 된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셨다.
이 비유는 너무도 단순하지만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른다.
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본다.
병은 심각하다.
그런데 환자가 말한다.
“저는 괜찮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훌륭해도 치료가 시작될 수 없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병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의사는 절망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이 된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나를 절망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구원자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죄의 자각은 복음의 문을 여는 중요한 순간이다.
이번 장에서 등장하는 세리 마태는 그 사실을 아주 극적으로 보여준다.
마태는 당시 유대 슬롯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단순한 세금 공무원이 아니었다. 같은 민족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민족적 배신자처럼 여겨졌고, 세금 징수 과정에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죄인이라는 이미지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가까이 지내기를 꺼렸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마태에게 다가가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놀라운 것은 마태의 반응이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나는 이 장면을 생각하며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마태의 회개에는 발이 있었다.
그의 생각만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세관에서 일어났다.
그의 삶의 방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순간 마태가 완벽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변화가 하나 있었다.
삶의 중심이 움직였다.
그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자리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던 회개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회개는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한다.
회개가 구원의 값을 치르는 인간의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충분히 울고,
충분히 후회하고,
충분히 죄바카라감을 느껴야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회개조차 또 다른 나의 공로가 될 수 있다.
복음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은혜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깨우시고 죄를 보게 하시며, 내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나는 죄에서 돌아서고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므로 회개는 구원의 입장료가 아니다.
은혜가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흔적이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른 뒤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곳에는 세리들과 당시 슬롯가 죄인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이 장면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은 불편했다.
그들의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거룩한 사람이라면 죄인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부정해지는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거룩함은 죄인을 피하는 거룩함이 아니었다.
죄 가운데 들어가 죄인을 건져내는 거룩함이었다.
여기서 의사의 비유가 다시 살아난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간다.
감염병 환자에게 가까이 간다고 해서 의사가 병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을 고치기 위해 가까이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죄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가까이 가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제사를 알고 있었지만 긍휼을 놓치고 있었다.
종교 의식에는 철저했지만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만이 아니라 긍휼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나에게도 불편하게 다가온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할 수 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오히려 사람에게 더 냉정해질 수도 있다.
교회생활에 성실한 사람이 자신의 성실함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의를 지키는 성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바리새인을 비판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내 안에도 바리새인이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나는 저 사람 같지는 않아.”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다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의 의를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다.
“나는 저 바리새인들과 다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또 하나의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은 시간이 갈수록
“나는 이제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라고 말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것 같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내 안의 죄 역시 더 정교하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는 행동만 죄라고 생각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동기까지 보게 된다.
자존심,
질투,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내가 중심이 되고 싶은 욕망.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죄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 예민하게 발견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깊이 의지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매일의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매일 다시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칭의는 나의 매일의 성적에 따라 취소되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구원의 근거는 나의 회개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나는 이미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이기에, 죄를 발견할 때마다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
그래서 매일의 회개는 법정에서 다시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서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과 비슷하다.
나는 넘어질 것이다.
또 교만해질 것이다.
다시 사람과 나를 비교할 것이다.
기도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할 것이고,
선행을 하면서도 은근히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때마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주님, 이것도 제 죄입니다.”
감추지 않고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다시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회개는 나를 끝없이 정죄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정죄받을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다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단순히 우울한 고백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말 뒤에는 더 큰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내가 병든 사람이기에 의사가 필요하다.
내가 스스로를 구할 수 없기에 구원자가 필요하다.
내 안에 나를 의롭게 만들 충분한 의가 없기에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망의 마지막 문장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첫 문장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나는 죄인이니 어쩔 수 없다.”
며 죄와 타협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은 마태에게
“네가 죄인이니 그냥 그 자리에 있어도 된다.”
고 하지 않으셨다.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죄인을 받아주시는 은혜는 동시에 죄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마태는 그 길을 따라 일어났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완벽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기에 더 주님을 필요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내 의를 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더 의지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얼마나 나은지를 계산하는 대신 내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를 기억하면서.
그리고 매일 다시 고백하고 싶다.
나는 나의 선행으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의 성품으로 서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내가 쌓아온 종교생활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그분께 나아간다.
죄를 감추지 않고,
자기 의를 붙들지 않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도 내려놓고,
은혜를 구하며.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주님,
다른 사람의 죄보다 제 죄를 먼저 보게 하소서.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매일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넘어질 때마다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세리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랐던 마태처럼
오늘도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