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시 계획한다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다음날 미니스트렐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게로스는 클로드 에티엔에게 물었다.
“’알트리에’는 지금 왕실 금고 안에 들어있지?”
클로드 에티엔의 착실한 얼굴이 활짝 펴졌다.
“네! 루브론에서 올라올 때 제일 먼저 잘 챙겨갖고 왔습니다.” 그는 형님이 드디어 사람같이 사시려나 하고 안심했는지 환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세르비카 대사님한테 청혼하시게요?”
클로드 에티엔은 미니스트렐에 가는 동안 조엘린한테 어떻게 청혼했는지 등등을 얘기해 주었다. 두 사람은 미니스트렐의 금고실로 가서 가장 안쪽에 임시로 보관 중인 왕실 금고를 열었다.
"알트리에입니다." 클로드 에티엔이 상자를 꺼내 게로스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왕이나 왕세자가 왕비 또는 왕세자비가 될 사람에게 선물하는 예물이 담긴 상자였다. 왕가의 문장이 수 놓인 벨벳으로 둘러싼 큰 상자 안에는 연청색 보석이 박힌 반지와 같은 색 보석들이 박힌 목걸이, 귀걸이, 팔찌와 같은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다. 라그나에게 보냈던 국혼 수락의 표시인 브로치와는 달리 이것은 결혼을 앞둔 왕의 신부에게 주어지는 예물이었다.
반지는 상자 안에서도 작은 별도의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금고실의 불빛을 받아 커다란 보석이 반짝거렸다.
"먼저 반지를 주고, 신부가 청혼을 수락하면 결혼식 때 장착하라고 나머지 예물도 줍니다." 클로드 에티엔은 게로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했다.
"반지만 먼저 가져가실 거죠?" 클로드 에티엔이 물었다.
"다 가져가려고." 게로스가 대답했다.
"아, 굳이 두 번 나눠서 주실 필요 없죠. 어차피 이건 세트니까요." 클로드 에티엔이 말했다. "세르비카 대사님이 한 번 착용해 보신 다음에는 저택 안의 금고실에 넣어 두면 되겠네요. 보안도 잘 되어 있습니다."
게로스는 반지만 한 번 꺼내서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고 도로 상자에 넣었다.
"이따가 집에 돌아갈 때 실어 줘."
"네, 그리고 오늘 저녁식사는 그럼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 달라고 조엘린에게 얘기해 놓겠습니다."
클로드 에티엔은 즉시 조엘린에게 보내는 쪽지를 써서 밖에서 기다리는 수행원에게 건넸다.
게로스는 미니스트렐에 마련된 자신의 임시 집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 언덕 위에는 공사가 한창인 슐로스 루와얄이 서 있었다. 푸른 탑들은 모두 멀쩡했지만 성벽과 궁의 전면부 등은 무너졌거나 파손되었으며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도록 꾸며진 정원은 모두 새로 심어야 할 정도로 모두 불타고 없었다.
"심하게 망가뜨려 놨군, 오스틴 놈들…"
게로스는 자신을 포로로 잡았던 테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갑자기 돌아간 것은 오스틴 내부의 민란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빨랐다. 민란으로 모든 함대 복귀 명령이 내려졌어도 오스틴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파렌베르크까지 본국의 연락이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필요했다. 그러나 새벽하늘에서 신들의 빛이 나타난 그날 바로 오스틴은 철수했다.
그들도 신들이 온 것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군 내부에서 무슨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불타버린 도시와 마을과 항구를 뒤로하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급히 돌아가 버렸다.
코린이 게로스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전쟁 보상금을 청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해야지. 하지만 누구에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어." 게로스가 대답했다. "거긴 아직 무정부 상태니까."
"위험해서 당분간 정보원 파견도 못하니, 다음번 군주가 빨리 결정돼서 각국에 연락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누가 될까? 레지널드와 사만다가 없으니 나머지 네 공주들과 레지널드의 형제들까지 가세해서 싸움이 어마어마하겠군."
"네 공주가 아니라 세 공주일 수도 있고요."
게로스는 코린을 돌아보았다. "왜? 사만다만 처형당한 게 아닌가?"
"확실한 건 아닌데, 퇴각할 때 오스틴 지휘관이 테사 제독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병이 나거나 해서 부관에게 맡겼을 수도 있지."
"그렇죠. 어쨌든 그들은 당분간은 자기들 싸움에 매여서 어딘가를 침략하진 못할 테니 다른 나라들도 한숨 돌리겠네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연합체를 만드는 방법도 생각해 봐야겠어. 스칼하븐도 쿠데타 때문에 당분간 남의 싸움에 참견할 처지도 아니니,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야. 티르윈에 먼저 제안을 해볼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리아네스 여왕은 적극적으로 동조할 겁니다."
게로스는 코린이 티르윈에 사절단 파견을 논의하기 위해 세드릭을 찾으러 가자 방 안에 혼자 남아 슐로스 루와얄을 다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세라비의 '괜찮아, 정말 괜찮아.’라고 하던 얼굴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정말 답답했으면 ‘네 퇴근이나 기다리고 있으려니 못살겠다.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올 테니 찾지 마라.’하고 1초 만에 짐을 싸갖고 나가도 모자랄 애가 입꼬리만 올리고 웃으며 '괜찮아' 하는 것은 뭔가 이질적이었다.
혹시 나 때문에 그동안 참고 지냈던 것이 아닐까? 파렌베르크에 데리고 올 게 아니라 이카리아에 먼저 보내서 이쪽이 다 정리될 때까지 몇 달간 만이라도 편안하게 집에서 쉬게 했었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세라비가 그와 함께 트루아벨과 파렌베르크에서 같이 지낸 지 거의 두 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지는 않은 기간이지만 재미는 없었겠지. 난 왜 세라비가 나랑 같이 파렌베르크에 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물론 세라비도 당연한 듯이 같이 따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물어봤었어야 했나?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바람에 같이 있어주려고 싫다는 말도 못 했을 수도…
'내가 너무 무심했어. 세라비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오늘 꼭 결혼하자고 해야겠다.'
게로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심란한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렸다.
사실 세라비를 왕비로 맞기에는 지금이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일단 세라비는 외국인이고, 왕족이나 귀족도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평민 출신 왕비나 국서는 얼마든지 있었다.
게로스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문제가 된 것은 아버지가 과거 행실이 좋지 않아서였지 평민이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게로스가 또다시 평민 왕비를 맞이하면 지금은 게로스가 무서워서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버지 얘기까지 꺼내며 '어머니가 평민 남편 들이더니, 아들도 평민 왕비 데리고 오네'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가 왕권이 강력하지만 그 왕권은 언제든 외부나 내부 요인으로 인해 약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게로스는 세라비를 뒤에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정당성과 명분을 확실히 해서 왕비로 세우고 싶었다. 세라비는 전쟁 중에 왕을 구했고, 이카리아에서 뤼넬을 가지고 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나라를 전쟁에서 구했다. 아직은 나라가 혼란스럽지만 정리가 되는 대로 공적을 널리 알리고 작위도 주어서 최소한 백작부인 정도는 만들어 놓고 왕비로 내세울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온 나라에서 게로스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광신도들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무리 신이고 부활한 왕이라 해도 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국민들이 왕의 결혼을 경사로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게로스는 일단 세라비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지금 청혼하더라도 식은 나라가 안정되고 작위도 수여한 다음에 가장 알맞은 때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슐로스 루와얄이 어느 정도 수리가 끝나고, 파렌베르크와 포르 칼레즈 같은 대도시만이라도 좀 정리가 되면, 그가 계획한 대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