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빌라 솔라스

이것만 마시면 온갖 병이 다 낫고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그럴 땐 ‘실물이 더 미인이시네요’라고 하는 거예요.”


레이가 말했다.


세라비는 레이에게 꿈에서 플레베르 여신을 만난 얘기를 들려주는 중이었다. 빌라 솔라스의 동쪽 윙에 마련된 레이의 방에서는 통창을 통해 파렌베르크의 찌푸린 겨울 하늘과 저택을 둘러싼 나무숲이 보였다. 나무숲 너머로는 파렌베르크 시내의 여기저기 수리가 한창인 밝은 회색 건물들과 굴뚝과 지붕창들이 펼쳐져 있었다.


빌라 솔라스는 클로드 에티엔의 집이었다. 그는 가족과 같이 트루아벨에 살다가 게로스를 도와 정무국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파렌베르크 시내의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파렌베르크에 복귀한 게로스가 왕궁이 수리되기 전까지 지낼 수 있도록 자기 집을 내주고 자신과 조엘린은 별채로 옮겼다.


“수리가 아니라, 부분 재건축이라고 봐야죠…”


그는 게로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왕궁 수리를 다 끝내지 못한 것이 미안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분적인 파괴의 바카라임을 지고 있는 레이도 그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게로스는 별채에서 지내도 상관없었으나, 저택의 연회실과 응접실을 임시 회의실이나 접견실로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에 저택의 본채에서 지내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클로드 에티엔과 같이 미니스트렐로 가서 업무를 보곤 했다.


“어쩌지? 석상하고 똑같다고 해서 여신님 화나셨으려나?”


“화나셨으면 세라비 님한테 주려던 거 도로 뺏어가셨을 텐데, 안 그러셨으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요?” 레이가 말했다.


세라비는 라마야나의 모교가 있는 르미앙에 초청받아 갔다 온 레이에게 플레베르 여신 얘기를 들려주는 중이었다. 레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라마야나의 모교 방문이라 의미도 있었지만 르미앙 마법학교에서 레이를 대마법사의 후계자로 극진히 대우했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너무 좋아서 빨리 돌아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며 레이는 학교에서 받은 선물을 죄다 꺼내서 보여주었다. 세라비는 불타는 파렌베르크를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레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다시 예전의 레이로 돌아와서 안심은 되는데… 좀 꼴 보기 싫다…’


레이는 이윽고 작은 병을 하나 꺼내서 보여 주었다. 병에는 물이 들어 있었고 겉에 ‘왕의 성수’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뭐야?”


“로멜리 마을 플레베르 신전의 성수래요.”


“우리가 갔던 거기? 거기 무슨 성수가 있어? 게다가 그냥 성수도 아니고 왕의 성수라니.”


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게로스 폐하가 신을 불러내서 전쟁을 끝낸 신전의 물이라고 지금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어요. 강물은 그래도 싼 편이고요, 신전 우물물은 가격이 20배라 너무 비싸서 못 샀어요. 아마 지금 플레베르 신전 절벽 밑에는 강물 퍼갖고 가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걸요. 그 물 마시면 병도 낫고 임산부는 순산하고 애들은 건강해진다고…”


세라비는 기가 막혀서 소파에 벌렁 쓰러졌다. 잠시 후 저택의 앞마당에 마차가 도착했다. 왕이 평소에 타고 다니는 마차가 아닌 미니스트렐의 공무용 마차에서 게로스와 클로드 에티엔과 코린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게로스는 왕의 마차가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파렌베르크 시민들이 달려와 엎드려 절하며 왕이시여! 성인이시여! 하고 울부짖는 바람에 얼마 전부터는 창문을 가린 공무용 마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어린애들을 데리고 와서 마차를 가로막고 축복해 달라는 사람들만 없었어도 웬만하면 그냥 타고 다니려고 했는데…”라고 게로스는 말했다. “사람 칠 뻔한 일이 몇 번 생기니까 안 되겠더라구.”


“폐하는 전쟁 전에도 이미 국민들에게는 반쯤 신이나 마찬가지셨죠.” 클로드 에티엔이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신들을 불러내서 전쟁을 끝낸 다음 부활까지 해 버리셨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습니다. 종교 하나 만드셔도 1년 안에 신전이 100개는 세워질 거예요.”


“플레베르 신전의 사제들 입단속을 했었어야지. 그 자들이 밖에 나가서 창조신들 나타난 얘기를 하고 다니는 바람에…”


“그땐 그럴 경황이 없었습니다.” 신들이 사라진 다음 쓰러진 게로스를 신전에서 트루아벨로 이송하던 것을 떠올리며 코린이 말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난 빛이 거의 전국에서 다 보였기 때문에 신들이 나타났다고 이미 여기저기서 소동이 일어났었어요. 그 직후 오스틴이 갑자기 썰물처럼 퇴각해 버렸으니 누가 봐도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거였죠.”


게로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민심을 이용하는 것에는 능했지만 통제 불가능한 민심은 위험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전쟁 직후의 불안한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신격화된 자신이 신이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세라비는 1층으로 게로스를 맞이하러 갔다. 게로스는 겉으로는 그다지 피로해 보이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렸는지 다가와서 맞이하는 세라비에게 온몸의 힘을 쭉 빼고 기댔다. 세라비는 “아 무거워!”하고 게로스를 밀어냈다.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밀어내다니…” 게로스가 원망스럽게 말했다. 세라비는 ‘이 사람 이젠 나한테 어리광도 부리네.’라고 속으로 웃으며 아까 레이가 건네준 ‘왕의 성수’를 게로스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네 성수. 이거 마시면 피곤한 거 바로 사라질 거야.”


“하… 진짜 미치겠네…” 게로스는 성수가 담긴 병을 손에 들고 한숨을 쉬었다. 세라비는 웃겨 죽겠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퍼온 줄도 모르는 물 안에 뭐가 있을지 알고 이걸 마시는 물로 팔아? 위생국은 대체 뭘 하는 거지?”


게로스는 물병을 들고 클로드 에티엔을 찾으러 별채로 갔다. 세라비는 그 뒷모습을 보며 “클로드 경은 퇴근도 없네…”하고 중얼거렸다.


세라비는 2층 중앙의 게로스의 방과 안문으로 연결된 방에서 지냈다. 방은 트루아벨의 손님용 객실보다 더 크고 편안했으며 조엘린과 저택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 말고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저택에서는 정원과 숲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파렌베르크 시내는 아직 어수선했으므로, 전쟁 전에 왕궁 안에서도 경호원 세 명을 데리고 다니던 세라비는 빌라 솔라스에 들어온 후에도 사복차림의 경호원을 데리고 외출해야만 했다.


오스틴도 스칼하븐도 없는 파렌베르크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무너진 지붕에 임시로 천막을 덧대 놓고 커피를 파는 카페와 빈 창틀을 새 나무틀로 대강 가려 놓은 서점, 아이들이 과자를 사려고 서성거리는 외벽에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는 빵집 등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도시의 활기로 넘쳤다. 세라비는 경호원을 데리고 혼자 나가 보기도 하고, 조엘린과 동행하기도 했다. 레이가 르미앙에서 돌아온 다음부터는 레이하고도 같이 나갔다.


게로스는 트루아벨에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기적과 같이 되살아나자 바로 파렌베르크로 돌아가려고 했다. 대공과 의사가 좀 더 회복될 때까지 머물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진짜로 빨리 회복했고 그보다 더 먼저 떠날 준비를 마쳤다. 클로드 에티엔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비상 체제는 ‘부활한 왕’이 귀환하자 다시 게로스를 중심으로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한꺼번에 다 하려는 듯이 게로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니스트렐이나 저택의 회의실이나 점차 복구되고 있는 슐로스 루와얄에 가 있다가 저녁식사도 다 치울 시간에 돌아오곤 했다. 어떤 때는 지방에 가서 며칠 후에 돌아오기도 했다. 게로스는 세라비를 지방의 복구 현장에 갈 때 데리고 간 적도 있었으나, 세라비는 한 번 가보고 이런 곳은 가벼운 마음으로 올 곳은 아니라며 다음부터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세라비는 트루아벨에서 병상에 누워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보던 게로스를 그가 돌아온 다음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잠시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세라비는 게로스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기 때문에 며칠 만에 한 번만 봐도 상관없었다. 지쳐서 돌아온 게로스가 세라비를 보면 안심하고 편안해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빌라 솔라스에서는 슐로스 루와얄보다 밖에 나가는 것도 더 자유롭고 게로스가 없어도 조엘린이나 레이가 저택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세라비는 그럭저럭 적적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솔라스에서 심심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조엘린이 안주인인 집에서 임시로 사는 것을 불편해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슐로스 루와얄 수리가 생각보다 빨리 되고 있어. 여름이 되기 전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라며 미안한 듯이 말했다. 세라비도 “그래, 이제 금방이네.”라며 웃었다. 게로스는 레이가 그를 구출할 때 부수어 놓은 침실과 의복실 얘기도 들려주면서 “덕분에 이번에 내 맘대로 완전히 다 고쳐 짓고 있어.”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파렌베르크에는 진눈깨비도 내리다가 차가운 비도 내리다가 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어떤 날은 드물게 눈이 많이 내리기도 했다. 빌라 솔라스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세라비는 저택을 둘러싼 숲 가장자리에 서서 부서진 지붕이나 무너진 벽들도 모두 하얀 눈에 덮여 아이싱을 덮은 케이크처럼 빛나는 파렌베르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와, 정말 아름답다. 전쟁으로 무너지지 않았으면 얼마나 예뻤을까?”하고 세라비는 옆에 선 레이에게 말했다. 이카리아에서도 최남단인 에르피냥에서 온 레이는 추운 것이 싫었는지 빨리 들어가자고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우리 동네는 바람 엄청 불겠다. 우리 집 지붕 나 떠나기 전에 새로 했는데 괜찮으려나?”


레이는 세라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물었다.


“집에 가긴 갈 거예요?”


세라비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에는 게로스가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세라비는 먼저 자겠다고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덮인 파렌베르크를 바라보는 레이와 세라비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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