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이젠 내가 결정할 차례

방해되는 것이 모두 사라진 후 드러난 것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는 그날 오전에는 레이하고 시내에 바카라을 사러 나갔다가 빌라 솔라스에 돌아와서 조엘린과 차를 마셨다. 세라비는 그날 산 바카라을 조엘린에게 보여주었다.


"『티르윈의 낮술하기 좋은 술집들』 이요?"


조엘린은 평소에 별로 웃음이 없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큰 소리로 웃었다.


"대사님은 술을 좋아하시나요?"


"술 마시러 가는 걸 좋아해요.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술집 분위기를 좋아하거든요." 조엘린이 그날따라 자신을 평소와는 다른 눈길로 쳐다본다고 생각하며 세라비가 대답했다.


"어떤 술집을 좋아하시는데요?"


"그냥 평범한 동네 술집이요. 파렌베르크 시내에도 그런 가게들 있더라구요. 바닥은 나무로 되어있고 천장은 좀 낮은 편이고 오래된 나무 테이블 있고… 사람들 시끌시끌하고 술집에서 술도 팔고 식사도 팔고… 특히 감자 요리 맛있게 하고…"


조엘린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세라비는 라를르 마을 술집이나 레이를 처음 만났던 프티 몽텔리의 술집(거기서 레이랑 같이 여주인에게 내동댕이쳐졌다)의 모습을 떠올리며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술집을 설명해 주었다.


조엘린이 말했다. "어떤 건지 알겠어요. 저는 고향이 레아브르인데 거긴 항구라서 거기 술집들은 더 엉망진창이었답니다.”


세라비는 귀족 가문의 여성인 조엘린이 항구의 지저분한 술집을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 더 물어보았다. "귀족인데 그런 곳에 가도 돼요?"


조엘린은 살짝 미소 지었다. "몰래 딱 한 번 가봤어요. 재미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한 번 가보고 그다음부터는 못 가게 됐죠."


세라비는 귀족 아가씨가 주정뱅이 뱃사람들이 굴러다니는 항구의 술집에 간 광경을 생각하니 우스워서 웃었다. 조엘린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언젠가 다시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다시는 못 가겠죠."


"왜요? 위험해서요?"


"전 왕가의 사람하고 결혼했으니까요."


세라비는 왠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와서 조엘린과 대화를 많이 해 보니 조용하고 차분한 첫인상과는 달리 소탈하고 모험심도 많아 보였던 것이다.


"내궁 업무에도 바쁘시니까 더더욱 시간도 없으시겠네요."


"네, 하지만 뭐 이제는 안 해도 될 수도…"


"하긴, 지금은 슐로스 루와얄이 공사 중이니까요."


조엘린은 세라비의 얼굴을 한 번 슥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게로스와 클로드 에티엔이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조엘린은 2층 식당방에 두 사람 몫의 식사 준비를 했다. 크고 화려한 은촛대와 겨울인데도 어떻게 구했는지 싱싱한 생화로 장식된 테이블을 보고 세라비는 ‘오늘 뭐 좋은 일이 있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식사로는 세라비가 좋아하는 요리들이 나왔지만 세라비는 이상하게 그날따라 싱숭생숭해서 많이 먹지 못했다. 조엘린이 “하지만 다시는 못 가보겠죠. 저는 왕가의 사람과 결혼했으니까요.“라고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아 게로스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도 못 듣고 멍하니 있었다.


게로스도 왠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긴장한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인들이 식사를 다 치운 다음 이제는 오스틴 내전으로 인해 구하기도 힘든 커피와 엄청나게 화려한 장식을 얹은 에클레르를 가지고 왔다. 세라비는 오늘이 무슨 날이긴 한가 보네,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인이 물러간 것을 확인하자 게로스는 세라비를 말없이 잠시 바라보았다.


"세라비,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뭔데?"


게로스는 푸른 벨벳으로 둘러싼 작은 상자 하나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세라비는 딴생각을 하다 말고 잠시 그 상자를 쳐다보았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상자를 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직접 상자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세라비는 상자 안을 쳐다보고 말했다. “반지네.”


반지에 박힌 연청색의 보석은 게로스와 그리고 클로드 에티엔, 오귀스트 대공의 눈 색깔과 똑같았다.


'이건 카를링겐 가문의… 아니 왕가의 보석이구나.' 세라비는 생각했다. “예쁘다. 네 눈 색하고 똑같네.”


"세라비, 나랑 결혼해 줄래?" 게로스가 물었다.


세라비는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다. 세상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세라비는 게로스를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게로스도 세라비를 좋아했다. 그러니 그가 청혼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의 완성이자 행복의 시작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인지 세라비는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 엄청 기뻐야 하는데,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세라비도 게로스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가 외국 공주하고 결혼하게 되었을 때 세라비는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너무 슬퍼서 발렌도르 대공저의 자기 방에 들어가 밤새도록 울었다. 자기에게만 향했던 그 눈빛과 상냥한 손길을 이제 남이 받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죽어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외국 공주가 미웠다. 그 사람을 게로스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러나 이제 방해되는 것은 모두 사라졌다. 외국의 군대는 물러갔고 공주도 돌아가고 죽어가던 게로스는 살아났다. 그는 이제 온전히 세라비의 것이었다. 게로스가 세라비를 사랑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냉정하기 짝이 없고 계산된 미소만 짓는 사람이 세라비에게는 따뜻하고, 장난스럽고, 편안한 얼굴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구부러진 핀 끝처럼 조금씩 찔러대고 있던 불편한 감정이 무엇인지 세라비는 이제 깨달았다. 그동안 전쟁과 신들과 죽음 같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 때문에 쳐다볼 새가 없어 덮어 놓았고, 게로스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을 때에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마주해야 하는 사실, 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 왔던 것 -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칼베르의 왕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저 왕가의 반지를 끼는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될 것이다. 내가 칼베르의 왕비? 세라비는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라를르의 들판에서 염소나 쫓으러 다니고, 문이 있어도 담을 넘어 다니는 내가 칼베르의 왕비? 왕도 아닌 왕가의 일원과 결혼한 조엘린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귀부인으로서 살아가는데, 하물며 왕과 결혼하면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세라비는 자신이 왕비가 된 모습을 아무리 노력해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마치 아이가 어른 옷을 입고 어른 흉내를 내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떠오를 뿐이었다. 지금도 파렌베르크에 그렇게 카페가 많아도 게로스하고 같이 한 번 가보지도 못했고, 쿠젤 강가에서 손잡고 산바카라도 해보지 못했다. 게로스는 태어날 때부터 직업이 정해진 사람이니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모르지만 세라비는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세라비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니까 카페도 빵집도 서점도 갈 수 있지만 왕비가 되면 이제 세라비도 게로스하고 똑같이 슐로스 루와얄과 왕가의 별장이나 영지들 안에서만 살아야 했다. 그게 전국 각지에 수십 개가 있다 한들 그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국정이나 외교에 영향이 가고, 어디 가서 실수라도 하면 다음날 신문에 나고, 매일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고귀한 드레스를 입고 왕과 함께 칼베르를 다스려야 하는 그런 자리에, 세라비는 앉을 수 없었다.


세라비가 대답을 하지 않자 게로스는 불안한 듯이 세라비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대답하기 어려워?"


세라비는 테이블 밑으로 내린 손을 꽉 쥐었다. '싫다고 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세라비는 게로스의 흔들리는 눈빛과 그 눈동자 색과 같은 반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걸 끼는 순간, 나는 라를르의 집과는 이별이야. 강가에서 자던 낮잠과도, 우리 동네 빵집의 갓 구운 버터빵도, 천장이 낮은 술집과 감자 요리와 나룻배도… 하지만… 게로스하고 같이 있고 싶은 것도 맞는데…


그동안 게로스와 함께 있는 것이 좋고, 좋다고 생각해서 ‘난 괜찮아’라는 말들로 억지로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이제 때가 된 듯 세라비의 마음속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게로스가 좋아,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살아나서 너무 기뻤어. 하지만… 그와 같이 있기 위해서 왕비가 되어야 한다면, 난 그렇게 살 수는 없어…


브레보뉴 숲에서 마차를 타고 돌아오던, 게로스가 말없이 손짓으로 옆으로 오라고 했던 그날, 누군가가 세라비에게 '지금 저 사람 옆으로 가시면 칼베르 왕비가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가실 건가요?’하고 알려 주었어도 그녀는 아마 가서 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네가 좋아'라고 말하듯 그의 어깨에 기대었을 것이다. 몇 번을 다시 돌아가도 아마 세라비는 그날과 똑같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왜냐면 정말로 게로스가 너무 좋았으니까. 오만한 눈빛을 하고 앉아서 외로워하고, 냉혹한 척하면서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우는 저 사람이 너무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게로스가 결정해 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결정해야 했다. 맞지도 않는 칼베르 왕비의 옷을 입고 게로스의 옆에 설 것인지, 아니면 죽을 만큼 마음이 아파도 결국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벽난로가 타오르는 식당. 게로스와 세라비 사이에 열린 반지 상자가 놓인 청혼의 순간.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안녕하세요? 마봉입니다.

벌써 90화네요. 이번 회차로 세라비 3권이 끝났습니다.

이제 4권으로 넘어가서 97화 + 에필로그 3화까지 딱 100화로 세라비는 완결입니다.

그동안 따라오느라 힘드셨죠?

달리느라 힘드셨으니 다음주는 3권 요약(월요일)과 3권 완결 이벤트(목요일)로 쉬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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