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우리 왔어요."
...
"아빠! 그만 좀 자. 어떻게 사람이 맨날 자?
나 있을 땐 자지 마! 자더라도 나 없을 때 자!
아빠 자고 있는 모습 보면 무섭단 말야..."
너희들이 깜깜해지면 오니까... 그전에 눈 좀
붙이고 있었던 거지..
뭘 그렇게 또 사 왔어?
"이거 티비에 나온 건데 건강에 그렇게 좋대!"
에휴.. 또 쓸데없는 데 돈 썼구나..
어디 보자.. 한약 같은 거네?
아빠는 이런 거 안 먹어봐서 잘 못 먹어
도윤아 너 먹어라.
"와.. 생각해서 사 온 건데 이래도 되는 거야?
야 개도윤! 니가 그걸 왜 처먹어!"
/
"엄마랑 아빠 주려고 가져온 건데
오빠가 왜 먹어!"
/
도윤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먼저 와 있던 너희들.
문밖에서부터 들리는 도아 울음소리에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현관문을 벌컥 열었는데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너와
입에 뭔가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너를 쳐다보고 있는 도윤이었지.
"왜? 또 무슨 일이야?"
"오빠가... 내가.. 학교에서 선생님이..."
"뚝. 천천히 얘기해봐."
"흐규흐규"
"도윤아 애 왜 이러니?"
"..."
우물대던 입마저 멈춘 채 도아를 쳐다보며
아무 말 없던 도윤이.
너는 울지 도윤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돼 있지.
퇴근하자마자 펼쳐진 그 난리에
성질이 확 올라오더라고.
"야! 애 왜 이러냐고! 왜 대답을 안 해!"
"..."
아빠 언성이 올라가자 대답 대신 눈물을
글썽거리던 도윤이.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고 있던 너.
"야. 너 말 못하냐? 혼날래?"
"... 귤.."
"귤?"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한 듯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도윤이가 뱉은 한마디는 귤이었어.
"귤이 뭐?"
"버리려는 줄 알고.."
"버리..야! 너 나랑 스무고개해?"
그때.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윤이에게
삿대질하면서 씩씩거리며 소리치던 너였어.
"내가 선생님한테 귤 받아서 엄마 아빠랑
나눠 먹으려고 조심히 가져왔는데
얘가 다 먹었어!"
"도아야.. 그렇다고 오빠한테 얘가 뭐야..
도윤이 왜 그랬어?"
그런 너를 붙잡고 도닥이며 달래면서
도윤이를 쳐다보곤 물었지
"..."
여전히 말이 없는 모습에 한숨부터 나오더라고.
사실.. 이미 말했었는데 말이지..
"대답 안 할 거야?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
"얘 봐라? 너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손들어!"
아빠의 큰소리에 눈이 빨개지는가 싶더니
결국 양 볼 위로 도르르 떨어지던 눈물.
아빠한테 들킬까 재빠르게 소매로 훔치며
말없이 벌을 서던 도윤이.
"도아야~ 아빠 엄마 못 먹었어도 괜찮아.
생각해줘서 너무 고마워."
겨우 너를 달래고는 너를 꼭 껴안으며
고맙다는 말을 하던 아빠.
그런 너와 나를 보며 벌을 서던 도윤이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아빠는 아직도 궁금한데
혹시 기억나면 얘기 좀 해줄래?
".... 기억 안 나요..."
그래.. 그게 도윤이 너지..
어렸을 땐 말도 잘하더니..
"어렸을 땐 말도 잘하더니.
끝까지 지가 잘했다고 한마디도 안 하더라니까?"
"에? 도윤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날 밤 엄마가 퇴근하고 같이 티비 앞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그날 있었던 얘기를 하고 있었지.
"도아가 귤을 얼마나 애지중지 가져왔겠어.
그걸 홀랑 먹어버리니 얼마나 화나?
근데 사과도 안 하고 저 잘했다고 어디서
묵비권이야!"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다시 화가 끓어올라
흥분하는 아빠를 보며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건네던 엄마.
"으이그. 도씨 아저씨 귤 못 먹어서 화났어?
귤 사다줘? 지금 갈까?"
"누가 귤 먹고 싶어서 그래?"
화를 삭히려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탁 내려놓며 말했지.
"얘가 안 그랬는데 클수록 지 동생이나 괴롭히고.."
"왜 우리 도윤이 구박해?"
"구박이 아니라..."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한다는 듯이 째려보며
말을 건네던 엄마.
"사정이 있었겠지.
왜 그랬다고 끝까지 얘기 안 했어?"
"사정은 무슨. 그냥 귤이 먹고 싶었겠지.
한마디도 안 했다니까?"
아빠의 말에 머리를 갸웃하며 캔맥주를 들어
마시려다 멈칫하던 엄마.
캔을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지.
"아니.. 이상하잖아. 어렸을 때부터 지가 주면 줬지.
누구 거 뺏은 적 있어? 그것도 이유 없이?"
"이유는 무슨 이유야 또.."
"아니 그렇잖아. 먹고 싶었다든가 무슨 이유라도
있어야지. 그런 것도 얘기 안 했다는 거잖아 지금."
"하아.. 어!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나 원 참 답답해서.. 리플레이로 보여줄 수도 없고..."
아빠는 그냥 답답할 뿐이었지.
"그나저나 내일부터 휴가다요!"
"그러게 짐은 다 쌌어?"
"쌌지~ 내 짐만 쌀걸.. 당신 거, 애들 거...
저 짐들 싸는 데만 일주일 걸렸다요...
다음부턴 자기 건 자기가 싸는 걸로.."
"하아..저거 내일 어떻게 싣냐.."
엄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캐리어 세 개와 큰 손가방 두 개, 작은 가방
두어 개로 이어진 짐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지.
"너 휴가 가라."
"네?"
몇 주 전 오후.
근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사님이 흡연실로
불러낸 거야.
"휴가 가라고 인마"
"갑자기요?"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던 이사님.
"아.. 감사하긴 한데.."
아빠의 반응에 담배를 입에 문 채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라는 표정을
짓던 이사님.
"이거 돈 아닌데?"
"네? 하하하.. 그럼.."
괜히 민망해서 억지웃음을 터트린 아빠였지.
"받아. 이거 거래처들 주려고 구매한 건데
어쩌다 보니까 남았다."
이사님이 주신 봉투를 열었더니 그 안에 든 건
리조트 4인 가족 이용권이었지.
"헉.. 와.. 이렇게 귀한 걸.."
"직원들한테 말하지 말고 조용히 갔다 와."
"그런데 이거 저 주셔도 됩니까..?"
아빠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한숨을 팍 내쉬던 이사님.
"하아.. 이 새끼 이거.. 야 인마 그럼 이걸 환불해서
회사에 다시 반납하냐?
그리고 인마 나 얼마 전에 와이프랑 싸웠어..."
"아이고 어쩌다가.."
"주민들이 신고해서 경찰도 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튼 남의 가정사 관심 갖지 말고 조용히 갔다 와."
"넵! 아.. 휴가는.. 제 휴가에서 까이는 거죠..?"
"... 이 새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이사님.
또 욕먹겠다 싶어 꾸벅 감사 인사를 하곤
사무실로 도망치던 아빠였어.
"이요~ 우리 첫 여행인데 사진 찍자!"
너희들이 태어나고 나서 첫 가족여행.
그동안 고생한 거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을까? 아빠 엄마는 물론, 너희들까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짓던 그날의 우리.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모습이
선명히 남아 있단다.
"아빠 저거.. 타고 싶어요.."
작은 목소리로 아빠 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을 건네던 도윤이.
"어? 뭐라고? 잠깐 일단 사진부터 찍자."
"..."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
첫 여행, 첫 가족사진을 찍은 우리.
"아빠! 우리도 저거 타는 거야? 나 저거 타고 싶어!
타자 응? 응?"
네가 가리킨 곳은 레일바이크였지.
사진을 찍은 아빠는 너희들을 데리고
매표소로 향했어.
"도윤이도 타고 싶어?"
"..."
"하아.. 대답을 좀.. 도윤이 말 못해?"
"아니요.."
"내가 아니냐고 물었냐? 타고 싶.. 하아.. 아니다.."
표를 끊는다고 바로 탈 수 있는 건 아니더라.
대기 시간이 생긴 우리는 매점으로 향했지.
"아빠! 나 저거! 포도맛!"
빙글빙글 돌아가는 슬러시 기계를 가리키며
포도맛 슬러시를 사달라고 하던 너.
"우리 도윤이는 뭐 먹을까? 오렌지? 포도?
뭐가 맛있지?"
엄마의 질문에 지체 없이, 그러나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도윤이.
"오렌지.."
그 모습이 또 왜 그렇게 서운하고 화가 나던지.
"너는 아빠가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하면서
엄마한테는 잘하네? 너 나 무시하냐?"
"..."
"또 대답 안 하는 거 봐. 안 사줘!
니 돈 주고 사 먹어 인마!"
그냥 서운함에 던진 장난 같은 말이었는데..
또 눈물을 뚝뚝 흘리던 도윤이.
"왜 이래.. 좋은 날.."
"아..아니.. 난 그냥.."
"이그.. 아빠라는 사람이 참 못됐다..
괜찮아 도윤아 엄마가 사줄게 가자.
도아도 가자요! 출동!"
그렇게 슬러시를 사 들고는 공터로 뛰어가
신나게 장난치며 놀던 너희 둘.
담배라도 피울까 싶어 주머니에서 꺼내
입에 무는데.
"애들 앞에선 좀.. 도씨 아저씨..
그게 좀 어떻게 안 될까..?"
"아마 안 보일 거야.."
"으이그~"
언제 왔는지 아빠 옆에서 잔소리를 하던
엄마였지.
뛰다가 지쳤는지 공터 벤치에 나란히 앉아
뭔가 서로 이야기를 하던 너희 둘.
그런데 갑자기 도윤이가 네 슬러시를
뺏는가 싶더니 바닥에 떨어뜨린 거야.
"으아앙!"
도아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너희에게로
달려가던 아빠.
"뭐야! 도윤이 너 아빠가 다 봤어!"
"으아앙 오빠가!"
큰 잘못이라도 한 듯이 살짝 떨기까지 하면서
아빠와 눈도 못 마주치던 도윤이.
"동생 걸 왜 뺏어!"
"..."
"대답 안 해? 사람 많으면 안 혼날 것 같아?"
아빠의 다그침에 또 눈물을 글썽이던
도윤이.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지..
"도아가.."
"핑계 대지 마! 아빠가 다 봤다니까?
잘못했으면 사과가 먼저지!"
그랬어.. 무슨 말을 할지, 왜 그랬는지 이유나
상황을 들으려 했던 게 아니었어.
내가 보고 느낀 게 잘못됐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내가 생각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만 보려 했던 거야.
답은 아빠 혼자 정한 거면서 말이지...
"..."
"대답 안 해?"
아빠가 도윤이를 혼내는 동안 엄마의 노력으로
겨우 울음을 그친 너. 도윤이를 혼내고 있는
아빠를 빤히 쳐다보더니 아빠에게 말을 건넸어.
"오빠랑 한 입씩 나눠 먹기로 했는데~
그래서 내 거 먼저 줬는데~
오빠가 놓쳤어! 다시 사줘!"
"어?..."
미안했냐고? 미안했지..
근데 말이야.. 어른의 사과는 생각보다
쉽지가 않단다.. 그 상대가 아이, 더군다나
자기 자식이라면 말이지....
"그러면 왜 그렇다고 말을 안 해!
너 벙어리야? 말 안 하고 있으면 해결돼?
얘기를 해야 네가 억울한 걸 알지!"
고개를 숙이고 슬러시 컵만 매만지던 도윤이.
"아저씨! 그만하지? 왜 이럴까 오늘?
나 버스 타고 집에 가?"
"어휴.. 내가 속이 터져 진짜.."
엄마의 협박 아닌 협박에 상황을
겨우 끝낼 수 있었어.
먼 길을 오면서 물처럼 마신 커피 때문이었을까?
화장실을 다녀온 아빠는 제일 먼저 너를 찾았어.
"도아. 가자 아빠가 다시 사줄게 ...
뭐야 그거? 엄마가 사줬어?"
슬러시를 다시 사주려고 너를 데리고 가려는데
이미 슬러시 컵을 끌어안고 빨대로 아주
야무지게 쪽쪽 빨아 먹고 있더라고.
"아니? 오빠가 나 먹으래 미안하다고."
"... 그럼 도윤이는?"
"반만 먹으래. 치사하게."
도윤이를 조용히 바라보던 아빠.
그런 아빠의 시선을 느꼈는지 네 손을 잡고
다른 데로 이동하던 도윤이.
그리고..
"잘한다~ 우리 신랑 자알~ 한다~"
팔짱을 끼고 아빠를 흘겨보던 엄마였지.
드디어 우리 순서가 됐고,
앞뒤로 두 명씩 타는 거라 자리를 정해야 했어.
"당신이랑 나랑 앞에 타고 애들 뒤에 태울까?"
"어휴 안 돼.. 애들 장난치다 사고 나면.."
"그렇지? 그럼 .. 야! 니들 누구랑 탈래?"
너희들을 바라보며 누구랑 탈 거냐고 묻는데
고민도 않고 아빠와 타겠다고 아빠 옆에
딱 달라붙던 너와는 다르게 머뭇거리며
고민하던 도윤이와 그걸 바라보고 있던
엄마였지.
"... 도아야! 엄마랑 타자~ 남자들이 앞에서
페달 밟아줘야지~ 도아야 그거 알아?
앞에 타면 .. 힘들어서 죽을 수도 있어.."
"그래? 그럼 오빠가 타!"
그렇게 도윤이는 아빠와 함께 앞자리에
앉게 되었어.
잠시 후 레일바이크가 출발하고.
아빠는 진짜 젖 먹던 힘을 다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지.. 최근에 이렇게 운동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말야.
"헉헉.. 야.. 너 밟고 있는.. 너.. 발이 안 닿는구나.."
도윤이 쪽을 봤는데 페달에 발조차 닿지 않은 채
그냥 허공에 떠 있더라고..
"하아.. 미진아! 도윤이 발도 안 닿는다.."
"꺄아~ 도아야~ 너~ 무 좋지?"
"응! 엄마 저기 구름 봐 코끼리 닮았어~"
"어머? 정말?"
엄마한테 하소연을 하려고 했지만
너와 이것저것 구경한다고 바쁜지
아빠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더라고..
'어우씨.. 군사훈련도 아니고...'
혼자 구시렁대면서 열심히 밟고 있는데
".. 아빠?"
"아 왜! 힘들어 좀 이따가!"
"..."
다리는 당기지.. 바람은 쌀쌀함에도
햇빛은 쨍쨍해서 땀은 줄줄 흐르지.
그 상황에서 도윤이랑 잡담할 힘이 있었겠니?
그저 빨리 완주하자란 생각뿐이었지.
"아빠.."
아빠의 짜증에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다시 아빠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도윤이었어.
"왜.. 왜!"
화난 건 아니었는데.. 뭔가 그때 상황이
힘든 상태여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던 게
너에겐 화를 내는 걸로 들렸을까?
잠시 멈칫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에게
물어왔어..
"아빠.. 아직도 저 사랑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