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크레파스

by도리

요즘에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빠 때만 해도

온라인 게임인들의 가장 큰 목표가 뭐였는지 아니?



"연봉 아니에요? 워라벨?"



워라벨이라..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도아야... 워라벨이 뭐니?



"이그 바보야. 그렇게 말하면 아빠가

어떻게 알아들어. 아빠 있지 그건~

일하고 내 개인적인 삶.. 그러니까.

정시퇴근! 선택적 회식 참여! 그리고.."



아.. 일 때문에 내 삶이 방해받지 않는 거.

그거 말하는 거구나?



"응! 돈도 좋은데. 일 때문에 내 일상생활이

무너지면 그건 퇴사각이지 뭐 헤헤.. 아빠

난 있잖아.."


"아니.. 도아 네 얘길 듣자는 게 아니잖아."


"뭐? 왜 시비야?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 게!

나 아직 아빠랑 말 다 안 했다고오!"



... 아빠 때는 말야. 연봉도 중요했고

그다음이..



"도과장님 축하해? 표정관리 안 되는 거 봐라.

그렇게 좋아?"


"아이고~ 남 말하네 대리님? 이제 대리 달아서

언제 따라올래?"


"... 너 나 또 우는 거 보고 싶냐?"


"아니.."


"헤헤 축하파티 해야지? 저녁에 한잔? 어때?"


"날도 더운데 무슨 술... 바빠.."


"그래도 밤엔 되게 추워~ 그럼 내일은?"


"바쁠 예정이고.."


"..모레는?"


"바쁠 거야 아마.."


"..."



연이은 프로젝트 성공을 비롯해

그동안의 업무 성과를 인정받아

과장으로 진급하던 날.



"둘이 축하파티 하는 거냐? 나도 데리고 가나?"


"이사님이 애들 노는 데 끼면 요즘 욕먹어요.

임원이 어딜 껴요?"


"야 도리야. 술값 안 필요하냐? 응? 야! 단무지.

술값 안 모잘라?"



팀장님은 이사로, 민차장은 부장으로,

그리고 외근 때문에 같이 있진 않았지만

권과장은 차장으로 모두 같이 승진하는 바람에

말 그대로 사무실 아니 우리 팀은 축제 분위기였어.



"언니! 아이고오.. 차장.. 아니지. 부장님.

도과장은 오늘 안 간대요. 바쁘지도 않은 게

바쁜 척이야."


"척이 아니라.. 흐아.. 나도 척이었음 좋겠다.

그쵸 이사님?"



이게 다 네가 시킨 그놈의 일 때문이다 라는

원망을 담아 이사님을 쳐다보며 말하는데

잠시 눈이 마주친 이사님은 이내 못 들은 척

눈을 피하며 말을 돌리더라고.



"... 아니 그래서 간다고 안 간다고?

껴준다고 안 껴준다고? 야 안 가. 치사해서 안 간다."



어린아이처럼 툴툴대며

자리로 돌아가시던 이사님.



"쉬엄쉬엄해. 너무 빨리 뛰려고만 하면

금방 지쳐. 건강도 챙겨야 하지 않겠어?"



내 어깨를 살짝 치며 조용히 말을 건네던

민부장.


사실 말야. 진급이라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별거 아니더라고..


딱 진급했을 때 10분 정도 기분 좋고

그 후에는 뭐랄까.. 그냥 평소와 다를 게 없달까?


나도 그대로고 일도 그대로고 회사도 모두

그대로니까 말야.


어쩌면 그건 있을지 모르겠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언제 온 건지 아빠가 앉아 있는 의자를

툭 치며 말을 건네던 이사님.



"네? 열한 신데요?"


"무슨 상관이야? 뭐라 할 사람이 누가 있냐?"



계급이 높아질수록 내 행동에 대해 지적하거나

뭐라 할 사람들 수가 적어진다는 거?


이사님의 지시 아닌 지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으로 향했지. 가끔 있던 일. 항상

괜히 가슴 두근거리고, 뭔가 엄청난 잘못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발길이 무거웠었는데


그날따라 신기하게도 아무 생각 없이 이사님 뒤를

따르고 있었어.



"저기 길 건너 새로 오픈한 데 갈걸 그랬나?

새로운 것도 먹어봐야 뭐가 좋은지 알지.

안 그러냐?"


"전 이것도 맛있는데요.."



자주 가던 해장국집. 뚝배기를 받자마자 국물부터

떠먹고 있는 아빠에게 얼마 전 길 건너에 새로

개업한 삼계탕집 쪽을 가리키며 말을 건네던 이사님.



"하긴 이상하게 난 삼계탕은 사 먹기 돈 아깝더라.

그거 영계 뭐냐? 몇천 원 안 하는 거 그거 만 원 넘게

받아먹는 거 참.."


"정성이.. 레시피가.."


"뭐? 너 삼계탕집 아들이여?"



그렇게 반 정도 먹어갈 때였나?

김치가 얼마 남지 않은 거야.



"김치 더 드실래요? 더 가져올까요?"



그런 아빠를 보며 식탁으로 몸을 숙여

식사를 하던 이사님은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건넸어.



"하아.. 야. 그런 건 인마 눈치껏 슥 해야지.

내가 가져오라고 하면 지시가 되잖아.

어차피 너 먹을 거 아냐? 그냥 조금 더 가져오면 되지."


"아.. 그럼 더 드시는 걸로.."



그냥 더 가져오라고 하면 되지

한숨까지 쉬나 싶어 살짝 짜증이 났지만

뭐.. 티를 낼 수 있나. 화를 낼 수 있나.

그냥 속으로 삼키는 아빠였지.



"여기 셀프냐?"


"네. 그렇더라구요.."


"우리 지금 꽁으로 먹냐?"


"팀장님이 내시겠죠? 아.. 이사님.."


"그럼 김치 값 따로 받냐? 아니면 남길 정도로

엄청 많이 퍼 올 생각이었냐?"


"...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를 해야

그만둘 것 같아. 얼굴도 안 보고 사과를 하던

아빠였지.



"으하하하하"


"어우.. 깜짝이야. 왜..왜요?"


"인마 돈 내고 손님으로서 내 역할만

문제없이 잘하면. 김치를 가져다 먹든

물을 가져다 마시든 그건 내 자유인 거야.

식당에서 허락한 거잖냐"


"..."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실눈을 뜨고 이사님을 쳐다보던 아빠.



"뭘 그렇게 보냐? 내 말이 틀리냐?

물을 바닥에 뿌려버린다거나 먹지도 못할 거

많이 가져와서 쓰레기로 만들거나. 식당에

피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렇..죠?"


"손님으로서 의무와 바카라임을 다하면

나에게 주어진 권리는 행사해도 되는 거 아니냐?

김치 이게 뭐라고 고민을 해 인마.

먹으라고 준 거잖아. 셀.프.서.비.스 인마.."



괜히 김치 한 점 더 먹겠다고 리필하려다가

잔소리만 엄청 먹어서 그런가. 식당을 나서는데

속이 답답한 게 얹힌 것 같은 느낌이더라..



"맛있는 거 먹었어? 뭐 먹었대? 와.. 오늘 점심..

대박.. 안 알려줄래.. 다시 떠올리기조차

끔찍해.."


"어..해장국.."


"해장국? 어디? 저기 골목에 있는 거? 와..

거기 맛있지. 내장탕에 소주 한잔! 캬!

아 근데 진짜 오늘 축하파티 안 할 거냐고오~"


"아.. 좀 시끄.. 끄억.."


"... 무슨 매너냐 이게.. 수..순댓국..?"



계속 가슴이 답답해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다가

결국 앞에서 재잘대던 정현이에게 정면으로

트림을 해버린 아빠였지..



"어우.. 체한 것 같은데? 아 좀 저리 가서 놀아."


"나 빼고 맛있는 거 먹으니까 그렇지. 순댓국!

순댓국 맞지? 냄새가 순댓국인데?"


"아오.."



속은 안 좋지, 정현이는 시끄럽지. 정신없는

그 상황이 너무 짜증이 나는 거야.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피하는 아빠였어.



"그래도 과장이 좋긴 하다. 1시 넘어서 들어오네?

나 너 11시쯤 나가는 거 다 봤는데~ 야 어디 가?"


"소화시키러 흡연실! 따라오지 마!"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번 크게 빨아들인 뒤

숨을 내뱉는데.



"후우우.. 우욱.. 우웩 켁켁.."



속도 안 좋은 상태에서 갑자기 많은 양의 담배가

들어가서였을까? 목에 뭔가 탁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헛구역질까지 하는 아빠였지.



'어후.. 제대로 얹힌 것 같은데..'



가슴을 좀 두드려보면 괜찮을까 싶어

그렇게 담배를 피며 계속 가슴을 두드리는데

흡연실 문이 조심스럽게 스윽 열리더니

몇 달 전 입사한 개발1팀 사원이 들어오더라고.



"우욱.. 안녕? 담배 피려고?"



애써 웃으며 건넨 인사. 그 후배는 아빠의 인사에

고개를 숙여 꾸벅하더니 우물쭈물한 말투와

조그만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을 건넸어.



"아.. 과장님. 이거 아까 과장님 찾는 전화 왔는데.."


"나?"



아빠에게 내민 조그만 포스트잇.

바로 사용해야 하는데 버그 문제로 급하게

수정해달라는 내용이었지.



"야. 이거 언제 온 건데?"


"아까 11시 20분쯤 첫 전화 받았습니다.."


"첫 전화? 한 번 온 게 아니야?"


"제가 받은 건 5번 정도.."


"언제까지 해결해야 된다는데?"


"14시에 행사 있으시다고.."


"야이.. 지금 몇 신데? 한 시간도 안 남았잖아!"


"아..자리에 안 계셔서..."


"핸드폰은 인마! 정지됐냐?"


"죄..죄송.."


"아씨 됐어. 뭐 해? 포스트잇 내놔!"



후배가 들고 있는 포스트잇을 낚아채듯이

강하게 뺏어 들고는 한 손으론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며 흡연실을 빠져나왔어.

고개를 숙인 채 꿈쩍 안 하는 후배를 두고 말이지...



"도과장! 정신 안 차리냐?"


"아.."



해결은 했냐고? 못했지.. 시간이 너무 촉박했거든.

고객도 담당자와 연결이 안 되자 자체 회의를 통해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한 후였고.. 행사를 망친

고객은 최고 관리자를 바꿔달라 해서

컴플레인과 함께 환불 요청을 했는데 그게

이사님이었던 거야.



"이 새끼 이거 형편없어? 과장 달면

일 대충대충 해도 되는 거냐?"


"아니.. 아까 점심.."


"야 이 새끼야! 일이 먼저지. 그게 지금 변명이야?"


"저도 방금 전달받았고,

여러 번 테스트했는데 거기서

버그가 터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격하게 화를 내시는

이사님을 보니 갑자기 울화가 치미는 거야.



"이 새끼 이거 웃긴 새끼네? 이거 누구 일이냐?

니 거 아니야? 지나가다 차가 치고 가면 아.. 칠지

몰랐어요 할 거야?"


"..."


"몰랐어요 가 방패냐? 넌 인마 바카라임자야.

바카라임자가 몰라서 그랬어요 라는 게 가당키나 해?"



자기한테 피해가 가서 저러지...

자기가 시킨 일이면서...

그렇게 생각이 되더라구.


점심 먹고 얹혀 답답한 가슴이

더욱 조여올 뿐이었지.


그렇게 한 10분 정도 서서 욕을 먹었을까?

계속 씩씩대던 이사님은 괜히 바카라상 위에 있던

서류를 들었다 꽝 하고 강하게 내려놓더니



"뭐 해! 가서 일 봐! 테스트 좀 꼼꼼히 해라.

밑에 애들 시켜서 테스트하게 하면 되잖아.

일머리가 그렇게 없냐? 당장 다 찾아내서 고쳐!"



마지막까지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이사님이었지.



"와.. 이사님 저렇게 화내는 거 오랜만에 본다..

너 괜찮아?"



자리에 앉자마자 아빠에게 몸을 가까이하고

귓속말하듯이 묻는 정현이



"하아.... 야.. 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냐?"



아빠 말에 눈을 껌뻑이며 할 말을 찾는 듯 보이던

정현이



"글쎄.. 줄 잘못 탄 거?"


"아 진짜.. 성격이 극단적이긴 딱 요즘 날씨 같네.."



또다시 올라오는 짜증에 바카라상을 한번 꽝 쳤다가

혹시 이사님이 듣지 않았을까 이사님 자리 쪽을

쳐다봤는데 다행히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이

없으시더라고.



'와.. 이거.. 내가 짠 거지만 참..'


'하아.. 주석이라도 좀 잘 달아놓을걸..'



분명 짜긴 내가 짠 건데. 무슨 생각으로 짠 건지.

왜 이렇게 짠 건지. 그때의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고.



"고칠 게 많니?"


"아.. 부장님. 네 많네요.. 생각보다.."



테스트하랴 코드 고치랴 정신이 없는데

차를 타서 오는 길인지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아빠 모니터를 보며 말을 건네는 민부장.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어.



"왜? 애들 시키지 혼자 하고 있어?"


"이게 편해요.."


"그래? 혼자가 편하구나?"


"후배들 시키면 잘하고 있나 일일이 확인해야 되고

그러다 또 실수라도 하면..."


"하면?"


"어차피 또 제가 혼날 텐데요 뭐.."



아빠의 한숨 섞인 힘없는 목소리에

잠시 말을 아끼던 민부장.

잠시 후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지.



"이거 언제 끝나는데?"


"하아.. 모르겠어요. 테스트할수록 안 보이던

버그가 보이네요.."



이어지는 한숨에 살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손을 내려놓던 민부장.



"내가 어제 아주 오랜만에 우리 딸 요리를 해줬거든?

잠깐 시간 되지?"


"네. 말씀하세요."


"완성돼서 간을 보는데.

이게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거지."



찻잔을 아빠 바카라상에 올려놓더니 팔짱을 끼는가 하면

손으로 크게 그러나 과하지 않게 제스처를 취하고,

살짝 인상을 쓰는가 하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웃는다든지..

얼굴과 온몸으로 말을 하는 민부장이었지.



"난 맨날 하던 대로 했던 거 같은데..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딸에게 줬어."


"따님이 알아채던가요?"


"야아.. 따님이 뭐야.. 내가 너무 늙어 보이잖아.."


"아.."


"한 숟가락 딱 떠먹더니 물어보더라고.

엄마? 참치액 대신 액젓 넣었네?

레시피대로 하라니까~ 그리고 양파 안 들어갔어~"


"대단하네요? 요리 잘하나 봐요?"


"아니? 나 닮아서 똥손이야.

요리도 많이 안 해봤고.. 그런데 도움이 되더라?"


"신기하네..."



의자까지 돌린 채 흥미롭게 듣고 있는 아빠를

지그시 쳐다보던 민부장.



"그치? 전혀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혼자보단 둘이 나은가 봐?

나 혼자 간 볼 때만 해도 뭐가 모자란지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몰랐거든."


"아..."


"근데 금방 찾았잖아? 내가 못하는 거, 나한테

어려운 게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 그럼 수고해."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뜨던 민부장.

민부장의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냐고?



'어쩌라고... 바빠 죽겠는데..'



생각을 할 시간이 어딨니..

이사님이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다 찾아내라는데..


두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담배 필 시간도 없이

코드를 얼마나 뚫어지게 봤는지

눈까지 침침한 것 같아 잠시 의자에 기대

기지개를 켜는데 문득 옆에서

웹서핑을 하고 있는 정현이가 보이더라.



"부럽다.. 너 할 일 없냐?"


"나? 다 했지. 도리야 이거 봐 이 옷 이쁘지 않아?

이게 나아? 이게 나아? 난 검은색이 좀 더 나은 것

같은데."


"... 검은색은 이상한데 그 옆에 건"


"그치? 이게 낫지?"


"너랑 안 어울려.."



더 이야기했다가는 또 정현이 페이스에 말려

사담만 늘어놓겠다는 생각에 원천 차단을

해버리는 아빠였지.


다시 컴퓨터로 눈을 돌리는데 이건 뭐..

내가 지금까지 어딜 보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는 거야.


어디까지 테스트했었지? 이 버튼 눌러봤었나?

아까 메시지가 떴었나? 작동이 잘됐나?

하나도 기억이 안 나더라고.



'하아.. 써서 좀 정리하면서 할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지.

일단 테스트부터 마쳐야겠다 싶어서

계속 기능을 실행하는데 이번엔 모니터 구석에

영상을 틀어놓고 혼자 킥킥대고 있는 정현이가

보이는 거야



"야.. 너 잘 논다.."


".. 뭐야 지금? 과장 됐다고 나 갈구는 거야?"


"아니, 진심 부러워서. 할 거 없으면 나 좀 도와줄래?"

부탁하던 아빠를 빤히 쳐다보던 정현이.


"업무지시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딨냐~?

뭐 하면 되는데?"


"이거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눌러보고..

아니야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고

잘 안 되거나 이상한 거 다 적어서 줘."


"... 과장님.. 저 지금 갑자기 급한 업무가 .."


"업무지시라며? 니가 그랬잖아 이거 지시야."


"와.. 퇴근 30분 남겨놓고 .. 이건 야근하라는 거잖아."




결국 우리는 그렇게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단둘이 야근을 하게 됐지.


시간이 아까워서 컴퓨터 앞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으면서 말야.



"야근을 시킬 거면 맛있는 거라도 사주든가.

회사카드로 컵라면이 웬 말이야.. 너 솔직히 말해.

사장님이 너네 아빠지?"


"다 찾았어?"


"하고 있다고.. 진급 첫날 야근이라니..

술파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사무실에서..

에휴.. 내 인생이 진짜 짠내나고 짠해서...으악! 찾았다!"


"잘하고 있네.. 계속 찾아.."



그때 울리던 아빠의 전화벨 소리.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엄마였어.



"계속 찾아줘 나 전화 받고 올게."


"야! 나 일 시키고 너 혼자 쉬러 가는 거지?

나 도망간다? 이거 다 삭제하고 잠적할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정현이를 뒤로하고

흡연실로 향했어.

담배에 불을 붙임과 동시에 받아 든 전화.



"여보?"


"... 누구지?"


"나야! 여보!"


"이상하네 미진이는 여보라고 안 하는데?"


"음.. 그럼 도씨 아저씨?"


"왜 도아야..."


"와! 아빠 어떻게 알았어? 난지?"


"엄마보다 목소리가 이뻐서 알았지."


"헤헤 왜 안 와? 보고 싶은데? 밖에 깜깜해."



별거 아닌 질문에 점심때 음식이 얹혔던 것처럼

가슴 한쪽이 답답하더라.



"아빠가 바빠..."


"응. 알아. 그래도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


"... 엄마는?"


"내가 보고 싶은데 엄마는 .. 아.. 잠깐만

아직 아빠랑 말 다 안 했다고오"



누군가 전화기를 뺏으려 한다는 듯이

짜증 섞인 고함을 지르던 너.



"애가.. 아빠 일하는데.. 얼른 가서 코 자야지?"


"애들 이제 재우려고?"


"그럼 시간이 몇 신데? 당신은 오늘 많이 늦어?"


"아니? 음.. 글쎄.."


"알았어~ 고생해. 도아야아~ 아빠 바쁘대. 코 자고

내일 보자 응?"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지만 아빠는

한동안 흡연실을 떠나지 못하고 애꿎은

담배만 계속 타들어갈 뿐이었어.



"와..담배 냄새.. 전화 받으러 가는 척하더니...

너 얼굴이 왜 그래?"



모니터를 보면서 중얼거리다 아빠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깜짝 놀라는 정현이.



"내 얼굴이 왜?"


"무슨 전환데..?"


"그냥 뭐 딸?"


"와 깜짝야.. 나 너 그 표정 지을 때마다

불안해 죽겠어. 왜? 빨리 들어오래?

그럼 퇴근해야지... 어쩔 수 없네 나머진 내일 해야지.

과장님이 퇴근하신다는데 나도.."


"앉아.."



아빠 핑계를 대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나려던 정현이.

한 손으로 정현이의 어깨를 잡고 살짝 주저앉히자

한숨을 팍 쉬며 털썩 내려앉던 정현이었지.



"하아.. 도과장님.. 내일도 출근하셔야죠..

오늘까지만 근무하실 거예요?"



/

"응. 알아. 그래도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

/



순간 너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더라고.



"정현아. 넌 일 왜 다니냐?"



아빠의 질문에 어이없단 표정을 짓던 정현이



"야.. 대박.. 너 그게 슬롯인에게 얼마나

치욕적인 질문인지 몰라? 내가 친구한테

이 소리 들을 줄은 진짜 몰랐다.."



"엥? 아니아니 진짜 궁금해서.

진급했다고 아침만 해도 그렇게 신났는데..

그게 유효기간이 고작 10분이더라고.."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던 아빠.

그런 아빠를 빤히 쳐다보던 정현이.



"사실 나는 모르겠어서. 승진하고, 돈 많이 벌고

그래서 돈 걱정 없이 우리 가족들하고 행복하게.."


"그러려면 사업을 해야지.. 월급으론 어휴..

택도 없지.."


"그러게.. 한 달 뭐 빠지게 일해봐야 통장에 찍히는

돈은 똑같은데.."


"그러니까 너무 갈아 넣으면서 열심히 하지 마.."


"지금 내가 뭐가 중요한지, 뭐 때문에 살고 있는지,

뭐 때문에 이렇게 아등바등하고 있는지..

모든 게 헷갈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



한동안 말이 없던 정현이.

잠시 후 가방을 슬쩍 챙기며 큰 목소리로

말을 건네더라구



"가자! 집에 가서 생각해보자!

여기서 답이 안 나오니까 자리를 옮겨보면

나오지 않을까?"


"에휴..그래 가자.. 내일 하지 뭐.."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결론은 나지 않았어.

심하게 얽힌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는 법이거든.


만약 말이야. 그때 그 실타래를

차라리 잘라버렸으면..

그랬다면 좀 달라졌을까?



"애들 .. 자네?"


"도씨 아저씨 왔다요?"



집에 도착하니 이미 오래전에 잠든 듯 이불까지

걷어차고 요상한 자세로 자고 있던 너희 둘.



"도아 때문에 혼났어. 당신 보고 잔다고 떼를.."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럼~ 알지이~ 고생했다 우리 신랑"


"애들은 오늘 아침에 잠깐 얼굴 본 게 다네?

내일이나 돼야 아빠 얼굴 보겠어."


"어쩔 수 없지.. 당신이나 나나 바쁘니까.."


"그렇지.. 어쩔 수 없지.. 먹고살려면.."


"맞다요! 우리끼리 얼굴만 뜯어 먹고 살 순

없는 거다요!"



엄마의 장난스런 말에 씁쓸한 웃음을 남기고

욕실로 향하던 아빠.



"아야.. 이건 뭐야?"



순간 아빠의 발에 뭔가 차이는 기분이 들어

내려다본 곳엔 도아의 스케치북이 놓여 있더라고.



"뭐 봐? 도아가 그린 거야?"



스케치북을 열어 도아가 그린 그림을 보는데..



"이게 뭐야? 우리 가족 그린 거야? 잘 그렸다..

이게 당신인가 보다. 그치?"



엄마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



"어? 그런데 왜 하필 배경이 밤이야...?

달도 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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