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이라는 탈 뒤에 숨은 오만

"제가 뭘요"라는 말이 사실은 가장 시끄러운 자기 자랑일 때

by쉼표JEONGSEON


"아유, 제가 뭘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남들이 나를 치켜세울 때 냉큼 받아먹지 않고, 한 발 물러나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는 나. 얼마나 성숙한가. 얼마나 그릇이 큰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가슴속에서 작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을 잘 해냈다는 뿌듯함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겸손을 떨었는데, 자아가 오히려 커진다.


이 지점에 이 글이 벗기려는 탈이 있다. 겸손이라는 탈은, 다른 탈과 다르게 참 억울한 누명을 쓴 척한다. "나는 나를 낮추는 사람인데, 뭐가 문제냐"라고. 그런데 낮춘다는 그 행위 안에, 실은 아무도 못 보게 숨겨둔 사다리가 하나 있다. 우리는 그 사다리를 타고,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위로 올라간다.


낮추는 자세가 가장 높은 자리일 때


생각해 보면 정말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자신이 낮아졌다는 것조차 모른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냥 자연스럽게 그러할 뿐이다. 그는 자기가 겸손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겸손을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겸손이 아니라 연기가 되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저는 정말 부족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배우는, 그 대사를 하는 자신을 관객석 맨 앞줄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우리의 겸손은 대부분 이 배우의 겸손이다. 누가 칭찬하면 우리는 재빨리 계산한다. 여기서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 잘난 척으로 보일 테니, "아니에요, 제가 뭘요" 하고 한 번 접어주자. 그러면 나는 실력도 있고 겸손하기까지 한 완벽한 사람이 된다. 이 계산이 얼마나 빠른지, 우리는 스스로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가장 낮은 자세가, 사실은 가장 높은 자리를 노린 수였던 것이다. 진짜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굳이 엎드릴 필요가 없다. 이미 바닥이니까. 엎드리는 자는, 엎드릴 만큼 높은 곳에 서 있는 자다.


방석의 폭로


하루는 손님이 돌아간 뒤, 방바닥에 놓인 낡은 방석을 정리하려다 문득 그것이 말을 걸어오는 상상을 했다. 오늘도 내가 손님에게 "누추한 곳까지 와주셔서" 어쩌고 하며 나를 한껏 낮추는 동안, 그 아래 깔려 있던 낡은 방석이.


"너, 아까 손님한테 뭐라고 했지? '차린 것도 없다'라고 했나?"


방석의 목소리는 눌린 것치고 또렷했다.


"근데 나는 봤어. 그 말하면서 네 어깨가 어떻게 펴지는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차린 것 없다' 할 때, 네 입꼬리가 어떻게 올라가는지. 너는 나를 밟고 서서 낮은 척을 하더라. 나야말로 진짜로 밑에 깔려서 아무 말 없는데, 정작 낮은 척은 내 위에 앉은 네가 다 하고 있었어.


진짜 낮은 게 뭔지 알려줄까? 나야. 나는 하루 종일 사람들 엉덩이 밑에 깔려서, 단 한 번도 '제가 방석입니다' 하고 나선 적이 없어. 낮은 자는 자기가 낮다고 말하지 않아. 말할 입이 애초에 위를 향해 있지 않거든.


너는 겸손한 게 아니야. 겸손을 연기하는 배우고, 나는 그 무대 바닥이야. 이제 그만 나한테서 좀 내려와라. 네 겸손, 무거워서 내 솜이 다 죽었다."


방석의 말은 솜처럼 눌렸지만 뼈에 닿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나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나는 낮아진 적이 없었다. 나는 낮은 자세를 취했을 뿐이고, 그 자세를 취하는 나를 늘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겸손이라는 방석 위에 오만하게 앉아서.


겸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오해는 말자. 겸손을 버리고 잘난 체하며 살라는 게 아니다. 그건 더 볼썽사나운 탈일 뿐이다.


내가 벗기려는 건 겸손 자체가 아니라, 겸손을 도구로 쓰는 그 손이다. 겸손을 통해 더 높이 평가받으려는 계산, 낮춤을 통해 더 큰 인정을 회수하려는 그 은밀한 장부. 진짜 겸손은 회수를 바라지 않는다. 칭찬을 접어주고서 "잘 접었다"라고 스스로 상을 주지 않는다. 그냥 접고, 잊는다.


우리가 자꾸 겸손을 연기하는 이유는, 실은 인정에 목말라서다. 대놓고 "나 잘났다"라고 하면 미움받을 걸 아니까, 겸손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같은 목적지—인정—에 도착하려는 것이다. 겸손은 그 우회로에 붙인 가장 고상한 표지판이다. 목적지는 똑같은데, 길만 예의 바르게 돌아가는.


그러니 다음에 "제가 뭘요"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려 할 때, 딱 한 번만 멈춰서 물어보라. 지금 나는 정말 나를 낮추고 있는가, 아니면 낮추는 나를 감상하고 있는가. 그 손사래가, 인정을 밀어내는 손인가, 아니면 더 큰 인정을 끌어당기는 손인가.


쉼표의 엉뚱한 질문


오늘 당신이 누군가에게 "별것 아니에요"라고 말했을 때,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무엇이 조금 부풀어 올랐는가. 정말 별것 아니라는 홀가분함이었는가, 아니면 별것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자신에 대한 은근한 만족이었는가.


당신이 매일 밟고 앉는 그 겸손이라는 방석은, 오늘도 당신을 낮은 사람으로 받쳐주었는가. 아니면 당신이 낮은 척 올라앉도록, 말없이 제 솜을 죽이고 있었는가.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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