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실 개원의 변(辯)
우리는 모두 탈을 쓰고 산다.
성실이라는 탈, 겸손이라는 탈, 긍정이라는 탈, 착함이라는 탈, 어른이라는 탈. 문제는 탈을 썼다는 게 아니다. 얼굴을 가려야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문제는 너무 오래 쓴 나머지, 그것이 제 얼굴인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벗는 법을 잊은 사람들이, 탈을 벗은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대. 나는 그 마당 한복판에서, 자꾸만 헛기침이 나왔다.
처음엔 나도 장단에 맞춰 웃어넘기려 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웃는 탈에 침 못 뱉는다니까. 남의 탈은 남의 사정이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예의'라는 것 역시, 내가 쓴 또 하나의 탈이었다는 걸. 불편한 걸 불편하다 말하지 않는 것, 이상한 걸 이상하다 말하지 않는 것. 그걸 성숙이라 부르며 나는 내 눈을 스스로 가려 왔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벗기기로.
생각해 보면 이건 아주 오래된 일이다.
옛 탈춤판에서 광대는 하회탈을 쓰고 마당 한복판에 섰다. 그러고는 그 시절 가장 힘센 자들 — 양반과 파계승과 세도가를 마음껏 조롱했다. 함부로 입에 담으면 목이 달아날 이야기를, 탈 하나 뒤에 숨어 큰 소리로 외쳤다. 관객은 "얼씨구" 추임새를 넣으며 함께 웃었고, 그 웃음 속에서 눌려 있던 것들이 잠시 숨을 쉬었다.
탈춤의 탈은 얼굴을 감추는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맨얼굴로는 차마 못 할 말을 하게 해주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그 광대의 자리에 서보기로 했다. 다만 내가 벗기려는 건 양반의 탈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고쳐 쓰는 그 탈들이다.
미리 말해 둔다. 이 방에 들어오면 따뜻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엔 위로하는 글이 넘친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요." 나도 그런 글을 쓴다. 다른 방에서. 하지만 이 방은 다르다. 이 방은 위로실이 아니라 해부실이다. 마취 없이, 미화 없이, 우리가 얼굴인 줄 알고 살아온 탈들을 도마 위에 올려 한 겹씩 벗겨 그 안을 들여다보는 곳.
해부는 잔인해 보인다. 하지만 잔인한 건 해부가 아니라, 병을 병인 줄 모르고 사는 일이다. 곪은 곳을 곪았다고 말하지 않는 다정함이, 실은 가장 무바카라임한 방치다. 나는 다정한 방관자보다, 정확한 해부자가 되기로 했다.
오해는 말자. 나는 성실한 사람을, 착한 사람을, 완장 찬 사람을 미워하려고 칼을 든 게 아니다.
내가 겨누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런 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세상이다. 왜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어나야 성실하다고 인정받는가. 왜 거절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가. 왜 알량한 완장 하나에 사람이 그렇게 달라지는가. 개인을 탓하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그 개인의 얼굴에 그 탈을 씌운 공장을 들여다봐야, 비로소 뭔가 보인다.
그러니 이 해부실에서 우리가 함께 도마에 올릴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근히 탈을 떠넘겨 온, 이름 없는 규칙들이다. 그 규칙의 배를 갈라 안을 보여주는 것. 그게 이 방의 일이다.
다만 한 가지는 약속한다.
나는 남의 탈만 벗기고 도망치는 비겁한 광대가 되지 않겠다. 이 연재의 마지막 편에서, 도마 위에 눕는 건 나 자신이다. 남의 탈을 벗기며 고개 끄덕이던 내 얼굴에도, 벗지 못한 탈이 몇 겹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걸 마지막에 스스로 벗어 보이는 것. 그 정직함이 없다면 이 해부실은 그저 남 흉보는 마당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여기까지가 이 방의 문패다.
당신이 그동안 웃는 탈 뒤에서 혼자 지쳐 있었다면, 다들 그렇다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얼굴에 붙여둔 것들이 어딘가 답답했다면 — 그 탈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된다. 이 안에서 우리는 예의라는 마취 없이,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도마에 오를 것은 '성실'이라는 탈이다.
가장 칭송받기에, 가장 오래 우리 얼굴에 눌어붙은 그 탈부터. 문 안에서 만나자.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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