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을 든 주인은 사라졌는데, 우리는 왜 스스로를 내리치는가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린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어젯밤 그 시각에 알람을 맞춘 건 나였고, 지금 이불을 걷어내는 것도 나다. 몸은 천근인데,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는 그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작고 뜨거운 것이 반짝인다. 뿌듯함이다. 나는 성실하다. 남들 자는 시간에 일어난 나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다.
바로 그 뿌듯함이, 이 글이 도마에 올리려는 것이다.
성실은 우리가 쓴 탈 중에서도 가장 벗기 어려운 탈이다. 다른 탈은 남이 볼까 부끄럽기라도 하다. 겸손한 척, 착한 척은 들키면 민망하다. 그런데 성실이라는 탈은 다르다. 우리는 이 탈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매일 아침 정성껏 닦아 얼굴에 붙인다. 자랑스럽게. 이 탈만큼은 벗으라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낸다. "성실한 게 대체 뭐가 문제냐"라고.
문제가 있다. 아주 깊은 곳에.
옛날의 착취는 차라리 정직했다.
채찍을 든 주인이 있었고, 끌려가는 종이 있었다. 종은 주인을 미워할 수 있었다. 도망칠 수도, 들고일어날 수도 있었다. 미움에는 방향이 있었으니까. 겨눌 과녁이 바깥에 분명히 있었으니까. 억울함이 억울함으로 남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주인이 사라졌다.
새벽 다섯 시에 나를 깨우는 주인은 없다. 감독관도, 지주도, 나를 몰아세우는 그 누구도 없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채찍질당하고 있다. 누구에게? 나에게. 나는 주인이 비운 그 자리에 스스로 기어올라, 종이 된 나를 내려다보며 채찍을 휘두른다. 더 일찍 일어나라고, 더 많이 하라고, 잠깐 쉬는 꼴도 못 보겠다고.
이 시대의 착취가 지독한 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워할 주인이 없다.
도망칠 곳도 없다. 채찍을 쥔 손이 내 손이니까. 들고일어나려 해도, 겨눌 과녁이 거울 속에 서 있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착취라 부르지 않는다. 자기 계발이라 부른다. 성장이라 부른다. 갓생이라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이름 바꾸기다. 노예의 노동에 '자유'라는 이름표를 붙이면, 노예는 채찍을 제 손으로 집어 든다. 심지어 감사하면서, 새벽마다 그것을 인증하면서.
하루는, 늘 그렇듯 다섯 시에 울린 알람을 끄려 손을 뻗다가, 문득 그 작은 물건이 말을 걸어오는 서늘한 상상을 했다. 매일 밤 내 손끝에 맞춰지고, 매일 새벽 내 잠을 찢어온 그 낡은 알람시계가.
"나, 너한테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알람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사람들은 나를 미워하더라. 아침마다 단잠을 깨워 괴롭히는 원수라고. 그런데 너는 알잖아. 나는 단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운 적이 없어. 매일 밤 나를 맞춘 건 너야. 몇 시에 울릴지 정한 것도, 여섯 시에서 다섯 시로 당긴 것도, 어젯밤 '내일은 더 일찍' 하며 눈금을 한 칸 더 옮긴 것도, 전부 너였어.
나는 네 적이 아니야. 나는 네 공범이야. 너는 매일 밤 나를 장전해서, 그 총구를 네 머리맡에 겨눠놓고 잠들어. 그리고 아침이 되면 방아쇠가 당겨지지. 나는 그저 네가 매일 밤 스스로에게 겨눈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일 뿐이야.
그러니 나를 부수지 마. 나를 던져버려도 소용없어. 너는 내일 또 새 알람을 살 테니까. 정말 멈추고 싶다면, 나를 끄기 전에 — 매일 밤 나를 네 관자놀이에 겨누는 그 손을 먼저 봐."
알람의 자백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 정확했다. 나는 그동안 알람을, 세상을,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무언가를 미워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원수는 밖에 없었다. 매일 밤 눈금을 당기던 내 손가락 끝에 있었다.
오해는 말자. 나는 지금 "그러니 다 내려놓고 푹 쉬어라"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또 하나의 달콤한 사탕이고, 이 방은 위로실이 아니다. 사탕은 다른 가게에서 팔고 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것뿐이다. 당신이 매일 휘두르는 그 채찍을, 딱 한 번만 똑바로 보라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온 게 아니라 당신 손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 성실이라는 탈을 자랑스럽게 닦아 붙이기 전에, 그 탈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한 번 읽어보라는 것. 거기엔 '미덕'이 아니라, '나는 멈추면 쓸모없어지는 인간'이라는 오래된 저주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성실을 놓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무서워서다. 멈추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쉬는 순간 뒤처진 낙오자가 될까 봐. 그 공포를 견디느니 차라리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게 쉽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한 게 아니라, 겁이 많은 것이다. 성실이라는 탈은, 그 겁먹은 맨얼굴을 가리기에 가장 그럴듯한 가면이었을 뿐이다.
번아웃은 게으른 자에게 오지 않는다. 그것은 채찍을 가장 열심히 휘두른 자에게, 자기를 가장 성실하게 착취한 자에게 정확히 찾아온다. 옛날 주인이 종을 죽도록 부리면 종이라도 남았다. 그런데 내가 나를 죽도록 부리면, 끝에 남는 사람이 없다. 자기 착취의 마지막에는, 갈려 사라진 나만 있다.
오늘 밤에도 당신은 알람을 맞출 것이다. 다섯 시에, 어쩌면 네 시 반에. 그 눈금을 한 칸 더 당기는 당신의 손가락은, 성실한 인간의 손인가. 아니면 매일 밤 제 머리맡에 총구를 겨누고서야 겨우 잠드는 사람의 손인가.
당신의 알람시계는 내일 아침 당신을 깨우려는가, 아니면 당신이 스스로에게 겨눠둔 방아쇠를, 오늘도 대신 당겨주는가.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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