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리골에서 배운 여름 나는 법, 초계탕

초계탕, 초계국수

by굳데이


하지(夏至)가 지나고 나면 바람 끝에 묻어나는 열기가 완연히 달라진다. 햇볕은 더욱 뜨거워지고, 그늘을 찾는 발걸음도 잦아진다. 옛사람들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기가 오면 몸을 보하는 음식을 정성스레 챙겨 먹는 풍습을 이어왔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복날'의 시작이 되었다.

뙤약볕 아래서 숨을 고르며 다가올 더위를 견뎌내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절기 문화인 셈이다.


뜨거운 삼계탕으로 땀을 내며 더위를 이겨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서울·경기에서는 얼음 동동 띄운 초계탕 한 그릇으로 여름을 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집 여름 보양식은 오래전부터 초계탕이었다.


그 시작은 파주 법원리의 깊은 골짜기, ‘초리골초계탕’ 식당이었다. 음식을 좋아하는 큰형수님은 새로운 맛집을 발견하면 늘 우리 삼 형제 가족을 불러 모았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형수님은 우리 세 형제 부부와 조카들을 데리고 그 깊은 골짜기의 식당으로 향했다.


턱밑까지 차오르던 지독한 여름 더위 속에서, 초리골 계곡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마주한 초계탕은 시각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닭은 뜨겁게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만 갖고 살아온 내게 얼음물속에 닭고기가 얌전하게 들어가 있는 모습이라니. 생소함도 잠시, 겨자와 식초가 어우러진 알싸하고 시원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더위에 지쳐있던 몸이 먼저 그 청량함을 기억하고 반겼다.


초계탕을 주문하면 커다란 대접에 담긴 물김치와 고소한 메밀 전, 쫄깃한 닭 날개가 차례로 상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등장하는 메인 대접 안에는 시원한 냉국을 바탕으로 결대로 찢은 담백한 닭살, 탱글한 도토리묵, 잘게 썬 아삭한 양배추가 푸짐하게 어우러져 한여름의 풍요를 이루었다.


돌이켜보면 초계탕 맛도 좋았지만, 여름 한낮을 온 가족이 함께 보냈다는 사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살얼음이 부딪히던 그릇 소리, 아이들이 뛰놀던 웃음소리,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더위를 식히던 오후의 풍경이 음식의 맛과 함께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식당을 나서며 문득 생각했다. 왜 이 시원한 음식을 '초계'라 부를까. 흔히 초계탕의 '계'를 평안도 사투리로 알싸한 '겨자'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사전이나 TV 음식 프로그램에서도 식초(醋 : 초산 초)의 새콤함과 겨자의 톡 쏘는 맛이 만났다 하여 그렇게 설명하곤 하니, 고개를 끄덕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옛날 요리바카라이나 오래된 궁중 기록들을 들여다보면, 이 음식의 진짜 이름은 닭 계(鷄) 자를 쓴 '초계탕(醋鷄湯)'이 맞다. 겨자가 대중적으로 쓰이기 훨씬 전부터, 맑은 닭 육수와 식초의 청량한 조합만으로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여기에 흥미로운 반전이 하나 더 숨어있다.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여름 보양식이지만, 원래 평안도와 함경도 등 이북 지방에서는 추운 겨울철에 즐기던 대중적인 별미였다. 겨울철에 잡은 닭을 푹 고아 기름기를 정성스럽게 걷어내고, 살얼음이 살포시 낀 동치미 국물과 섞어 메밀면을 말아먹던 추운 겨울날의 음식이었다.


그 정갈하고 깊은 맛이 6·25 전쟁 이후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의 손을 거쳐 서울 을지로의 '평래옥' 같은 노포로, 또 파주의 '초리골초계탕' 식당으로 번져나가며 이제는 우리의 지친 한여름을 위로해 주는 귀하고 시원한 냉(冷) 보양식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한동안 그 깊은 계곡까지 차를 몰고 가지 못했다. 하지만 여름 바람이 문득 불어올 때면 그 정겨웠던 날들의 기억이 아스라이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올해는 그 시절의 푸르던 추억을 식탁 위로 불러내기 위해, 집에서 정성스레 초계탕을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깨끗하게 손질한 닭을 황기, 대파 같이 잡내를 잡아주는 채소들과 함께 푹 삶아낸 뒤, 육수는 차갑게 식혀 굳은 기름을 걸러내고 식초, 겨자를 섞어 준비한다. 잘 삶아진 닭고기는 결대로 곱게 찢어 소금과 후추로 살짝 밑간을 해둔다.


그릇에 닭고기의 흰색, 양배추의 자주색, 오이의 싱그러운 초록색 그리고 참외, 방울토마토를 정갈하게 담아낸다. 보기만 해도 방 안의 온도가 2도는 내려가는 듯한 시각적 청량함이 식탁 위에 내려앉는다.







# 재료


닭 1마리(12호), 물 2리터, 닭 삶기 재료(황기 2 뿌리, 대파 1대, 통후추 1/2Ts, 소주 150ml), 닭고기 밑간(소금 3꼬집, 후추 1꼬집), 육수 1리터 기준 양념비율(식초 7Ts, 원당 2.5Ts, 소금 1.5Ts, 겨자 취향껏), 적색 양배추 100g, 오이 80g, 참외 반 개, 방울토마토 4개

* 육수 1리터, 야채는 2인 기준입니다



# 요리 과정


냉동 닭(머리, 날개, 꽁지를 제거)을 준비합니다


닭을 강불에서 4분 삶아 식힌 후 지방, 피 등 불순물을 손으로 제거합니다


큰 냄비에 물, 손질한 닭, 닭 삶기 재료를 넣고 강불에서 15분, 중불에서 15분 삶습니다


닭을 푹 삶았습니다


닭살은 손으로 결결이 찢어 준비합니다


닭살 밑간을 합니다


육수는 식힌 후 기름띠를 걷어내고 양념을 하고 냉장고에 넣어 둡니다


오이를 채 썹니다


양배추를 채 썹니다


참외는 씨를 제거하고 잘게 썹니다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썹니다


메밀면을 삶아 준비합니다


닭고기와 야채, 과일, 육수를 그릇에 담아 초계탕 한 그릇을 완성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초계탕






정성을 들여 만든 초계탕을 넓은 도자기 그릇에 담아 아내와 마주 앉았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맑은 육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첫맛은 새콤했고, 뒤이어 겨자의 알싸함이 은은하게 퍼졌다. 기름기를 걷어낸 닭 육수는 담백했고, 채소의 아삭한 식감이 더해져 더위에 지친 몸을 말끔히 씻어내는 듯했다. 건더기를 다 먹은 뒤 메밀면을 말아 후루룩 들이키니, 시원함과 구수함이 어우러져 입안 가득 여름이 머무는 것 같았다.


삼계탕이 뜨거운 기운으로 한여름의 더위를 이열치열로 다스리는 음식이라면, 초계탕은 지친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어 다시금 가쁜 숨을 고르게 만드는 다정한 위로의 음식이다.


나이가 들수록 맛은 혀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뜨거운 불 앞에서 닭을 삶고, 기름을 걷어내고, 살코기를 정성껏 찢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한 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살얼음이 부딪히던 그릇 소리, 아이들이 마당을 뛰어다니던 웃음소리, 그리고 "시원하다"며 서로의 그릇을 들여다보던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식탁 위로 불러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앞으로 마주해야 할 삼복더위는 길고도 지루할 것이다. 하지만 주방 한편에 정성껏 준비한 초계탕 한 그릇이 있다면, 여름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초계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우리 집 여름 한 철을 담아 두었던 한 그릇의 풍경이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