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나물
한여름 시장은 유난히 생기가 넘친다. 청량한 오이와 붉게 익은 토마토 사이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머무는 것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보랏빛 가지다. 윤기가 흐르는 가지를 하나씩 들어보고 단단하고 묵직한 것을 고르는 일은 이맘때만 누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다. 게다가 가격도 부담이 없어 장바구니에 서너 개 담아 오면 괜스레 마음까지 든든해진다. 그렇게 사 온 가지는 우리 집 여름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사실 나는 가지 반찬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떤 이들은 특유의 물컹한 식감이 싫다고 하지만, 내게는 그 부드러움이야말로 여름의 맛이었다. 밥숟가락 위에 얹어 먹던 촉촉한 가지, 다 먹고 난 접시 바닥에 자박하게 고여 있던 양념 국물, 그리고 그 위에 미세하게 떠돌던 고소한 참기름의 흔적까지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여름 식탁에 가지 반찬이 올라오는 날은 언제나 기다려지는 반가운 날이었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식탁 위에 가지 반찬을 내놓았다. 그런데 젓가락으로 집어 든 가지는 내가 기억하던 녀석과 꽤 달랐다. 소금에 절여 물기를 꼭 짜낸 뒤 무쳐낸 아내의 가지는 담백하고 꼬들꼬들한 매력이 있었지만,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맛'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먹었던 자박한 국물의 가지 맛을 흐릿한 기억의 단어들로 열심히 설명해 보았지만, 막연한 묘사만으로 그 맛을 온전히 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 역시 정확한 조리법을 알지 못했고, 아내에게도 그런 방식은 생소했다. 결국 그리운 맛은 우리 집 식탁 위에 오르지 못했고, 오랜 세월 우리 집 냉장고에서 가지는 소외된 식재료가 되었다.
십 년쯤 전이었을까, 뜻밖의 곳에서 어린 시절의 맛을 다시 만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내와 가끔 찾던 동네 갈비탕집에서 밑반찬으로 가지 요리가 나온 날이었다. 무심코 한입 베어 문 순간, 오래 잊고 있던 여름 식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입안에서 사르르 풀어지는 부드러운 식감과 자작하게 배어든 양념까지,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 시절의 맛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내도 "가지가 어떻게 이렇게 촉촉하고 맛있을 수 있느냐."며 연신 젓가락을 들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접시를 깨끗이 비워냈다. 식당을 나서는 길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늘 이야기하던 어린 시절 가지 반찬이 바로 이런 맛이었나 봐요. 우리도 한번 만들어 볼까요?"
그날 이후 나는 가지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요리바카라도 뒤적이며 기억 속 그 맛을 하나씩 더듬어 갔다. 양념을 조금씩 바꿔 보고, 찌는 시간도 달리해 보았다. 그 갈비탕집에도 일부러 몇 번 더 찾아가 가지의 식감과 양념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만들고, 맛보고, 다시 고치기를 반복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분명했지만, 그 맛을 식탁 위에 다시 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마침내 기억 속 맛과 제법 닮은 가지나물이 완성되었다. 조심스럽게 한 접시를 아내 앞에 내놓았다. 한입 맛본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어린 시절의 여름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음식은 기억을 가장 오래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한입의 맛 앞에서는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가지나물 한 접시는 내게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여름을 다시 만나는 방법이었다.
달고 짭조름한 양념을 듬뿍 입힌 가지도 분명 맛있다. 하지만 가지 본연의 맛을 살린 담백한 조리법이 더 마음에 든다. 푹 찐 가지는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식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한입 먹을 때마다 여름 채소의 싱그러움이 전해진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가지 속 가득 찬 영양과 항산화 성분을 가장 건강하게 흡수하는 다정한 지혜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나는 언제나 가장 먼저 가지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내가 만드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가지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김이 오른 찜기에 무르지 않게 쪄낸다. 뜨거운 김을 잠시 날려 보낸 뒤, 손끝으로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낸다. 여기에 약간의 국간장과 멸치액젓으로 단정하게 밑간을 잡고, 칼칼한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얹어 들기름 한 바퀴, 통깨 톡톡 뿌려 가볍게 버무려 내는 것이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맛이었다. 처음에는 이를 국물이 자박하다 하여 '가지찜'이라 불러야 할지, 무쳐냈다 하여 '가지나물'이라 불러야 할지 헷갈렸지만, 결국 이름이 무엇인들 어떠랴 싶다. 찌고 찢어서 가볍게 무쳐낸 이 한 접시는 내게 여름 그 자체다.
# 재료
가지 3개, 대파 흰 부분 1/2대, 청양고추 1/2개, 홍고추 1/2개, 양념장(국간장 1.5Ts, 멸치액젓 0.5Ts, 다진마늘 1Ts, 고추가루 1ts, ), 들기름 0.5Ts, 통깨 0.5Ts
# 요리 과정
가지를 깨끗이 씻어 준비한다
가지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다. 큰 가지는 3 등분한다
자른 가지를 다시 세로로 반으로 갈라 찜기에 가지런히 담는다
물이 끓으면 뚜껑을 닫고 강불에서 4분간 찐다
찐 가지는 한 김 식힌 뒤 손으로 큼직하게 찢어 가볍게 물기를 짜고 볼에 담아 둔다
대파를 잘게 썬다
고추를 잘게 썬다
양념장을 만든다
볼에 가지, 대파, 고추, 양념장을 넣는다
양념이 가지에 고루 배도록 손으로 버무린 뒤, 들기름과 통깨를 넣어 한 번 더 가볍게 버무리면 가지나물이 완성된다
완성한 가지나물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가지나물
완성된 가지나물을 하얀 쌀밥 위에 얹어 한 입 먹어본다. 국간장과 액젓의 깊은 감칠맛이 가지 특유의 달큼한 즙과 어우러져 입안을 가득 채우고, 씹을 때마다 매콤한 청양고추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드러움에 산뜻한 타격감을 준다. 마지막에 감도는 묵직한 들기름의 고소함은 모든 맛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자극적인 조미료 없이도 이렇게 깊고 가득 찬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오랫동안 우리 집 식탁에서 잊혔던 가지 반찬은 이제 후끈한 기운이 내려앉는 여름 밥상에서 자주 부름을 받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먼 길을 돌아 유년의 그리움을 더듬어 찾아낸 맛이기에 더욱 각별하다. 무덥고 지치기 쉬운 여름날, 몸도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고 싶은 날이라면 가지 한 봉지를 사다 가만히 쪄보는 것은 어떨까. 가지를 찌고, 찢고, 조심스레 버무리는 동안 여름은 어느새 식탁 위에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