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장어 구이
어렴풋이 잠이 깨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 골목길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갖가지 행상들의 활기찬 외침은 유년 시절 부산 집의 하루를 알리는 정겨운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 대문 앞에는 우렁찬 외침 대신,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아주 특별한 발걸음이 따로 있었다.
초여름 무렵이면 어김없이 대문을 두드리시던, 커다란 빨간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땀방울을 흘리며 걸어오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땅바닥에 내려놓은 대야 속에는 보기만 해도 생동감 넘치게 요동치며 꿈틀거리는 민물장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징그럽다며 뒤로 쏙 숨어버리는 자식들의 소란에도, 어머니는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머니를 반갑게 맞이하고 장어를 넉넉히 사들이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사들인 민물장어를 큰 솥에 넣고 푹 고아 내셨다. 뽀얀 국물이 우러날 때까지 아궁이 앞을 지키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국물은 단순한 보양식이 아니라 무더운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라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이거 묵고 올여름 건강하게 보내야 한데이." 코를 찌르는 진한 장어 냄새에 처음에는 코를 쥐어짜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소금 한 꼬집을 넣고 후후 불어 마시던 그 뜨끈하고 고소한 국물은 어느새 우리 남매들의 뼈와 살이 되었다. 어머니의 온 정성과 땀방울이 버무려진 그 시절의 민물장어 곰국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보양식의 기억으로 따뜻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장어에 대한 기억은 청춘의 길목에서 또 다른 색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거칠고 활기찬 기운이 넘실거리던 부산 자갈치시장은 내가 처음으로 술을 배우던 곳이었다. 대학생 시절, 주머니 사정이 가벼웠던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매콤한 양념에 연기를 풀풀 풍기며 구워지던 꼼장어 한 판은 최고의 안주였다. 연탄불 위에서 꿈틀거리며 맛있게 익어가는 꼼장어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며, 우리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포부를 나누었다.
지금은 자갈치시장도 현대식 건물로 바뀌고 옛 풍경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성업 중인 꼼장어 가게 골목에 들어설 때면 그 시절의 매캐한 연기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래서 가끔 고향을 찾을 때면 일부러 그 골목을 찾아 그리운 추억을 되새기며 꼼장어를 맛보곤 한다.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하면서는 또 다른 장어의 맛을 알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잠시 근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길목에 자리해 예로부터 민물장어로 이름이 높은 곳이었다. 탁 트인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식당들에 앉아,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도톰한 민물장어구이를 처음 맛보았을 때의 감흥은 무척 신선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푹 고아주셨던 뽀얗고 걸쭉한 국물과는 또 다르게, 달콤 짭조름한 간장 양념이나 깔끔한 소금구이로 즐기는 민물장어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세련된 또 다른 맛이었다. 고단했던 온라인 게임 생활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나누던 그 맛있는 장어구이는 격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수많은 장어의 기억 가운데 가장 특별한 순간은 따로 있다. 큰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였다. 아내가 어느 날 난데없이 "장어가 먹고 싶다"라고 말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의 입에서 특정 음식을 콕 집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뱃속의 아이가 보내는 신호였을까. 마음이 급해진 나는 부랴부랴 소문난 맛집을 수소문했다. 당시 화곡터널 부근에 장어를 아주 맛있게 잘한다는 식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먹었던 것은 민물장어였다. 숯불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장어를 생강채와 함께 깻잎에 싸서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의 의미를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아내는 신기하게도 그때 이후로는 지금도 장어를 그리 즐겨 먹지 않는 편이다. 정말로 그 시절, 우리에게 와준 첫째 아이를 건강하게 만나고 싶었던 예비 엄마의 간절하고도 본능적인 바람이었던 셈이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우리 부부도 젊은 날을 지나 중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화려한 외식보다 집에서 함께 먹는 소박한 한 끼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요즘 들어 부쩍 더워진 날씨에 여름 보양식을 준비해 보기로 했다. 문득 내 삶 곳곳에 스며 있던 장어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한살림에서 구입한 바다장어로 고추장구이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민물장어 곰국과는 다른 음식이지만, 장어가 주는 든든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고추장에 간장과 다진 마늘을 섞어 매콤한 양념장을 만들었다. 달궈진 팬 위로 양념장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뽀얀 장어 살을 넣고 양념이 고루 배도록 조심스레 졸이듯 버무려냈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주방 가득 퍼지며 오래전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 재료
바다장어 3마리(작은 장어 2마리 포함), 단호박 220g, 장어 밑간(청주 3Ts, 생강가루 1ts), 고추장 소스(고추장 3Ts, 진간장 2Ts, 알룰로스 2Ts, 다진마늘 1Ts, 다진파 2Ts, 생강가루 1ts, 물 4Ts), 전분 가루, 식용유, 깻잎(쌈용), 백초생강, 적초생강, 절인고추 적정량
# 요리 과정
냉동장어를 준비했습니다
가위를 사용해서 지느러미를 손질합니다
뜨거운 물을 장어에 붓습니다
숟가락으로 긁어 비늘을 제거합니다
안쪽에 잔 칼집을 냅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줍니다
밑간용 재료를 준비합니다
밑간용 재료를 부어 10분 재어둡니다
전분 가루를 얇게 입힙니다
팬에 식용유를 붓고 마늘 3개, 생강 1개를 넣습니다
기포가 올라오면 장어를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튀깁니다 (5분)
장어를 꺼내어 식힙니다
단호박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둡니다
소금 1/4ts를 넣고 10분간 재웁니다
수분을 제거하고 전분 가루를 얇게 입힙니다
단호박을 넣고 튀깁니다 (2분)
단호박을 꺼내어 식힙니다
고추장 소스를 준비합니다
팬에 고추장 소스를 넣고 끓으면 장어와 단호박을 넣고 소스가 고루 배도록 졸이듯 버무립니다
완성한 '고추장 장어 구이'
잘 구워진 바다장어 고추장구이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첫맛은 매콤했고, 뒤이어 담백하고 고소한 풍미가 천천히 퍼졌다. 민물장어처럼 기름지지 않고 씹을수록 깊은 맛이 올라왔다. 무엇보다 단맛을 즐기지 않는 우리 부부의 입맛에 잘 맞았다. 아내도 연신 맛있다며 젓가락을 가져갔다. 문득 첫아이를 기다리며 함께 장어를 먹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화곡동 식당에서 마주 앉아 있던 젊은 부부는 어느새 오랜 시간을 함께 건너온 동반자가 되었지만, 서로의 건강을 챙기며 음식을 나누는 마음만큼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장어라는 평범한 식재료 하나에 내 인생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던 유년의 민물장어 곰국에서부터 청춘의 푸념과 호기를 받아주던 자갈치시장의 꼼장어와 소주잔, 그리고 소중한 나의 가족과 마주 앉아 온기를 나누던 식탁 위 장어구이까지. 장어는 늘 다른 모습으로 내 삶에 찾아왔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한결같았다. 누군가의 사랑이었고, 우정이었고, 가족이었으며, 삶을 견디게 해주는 따뜻한 위로였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게 하고, 잊고 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오늘 아내와 함께 먹은 바다장어 구이도 언젠가는 또 하나의 추억이 되어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매서운 더위가 찾아오겠지만 그리 두렵지는 않다. 어린 시절 나를 키워준 어머니의 장어 국물처럼, 그리고 오늘 식탁 위에 오른 바다장어 구이처럼, 결국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었던 따뜻한 식사의 기억들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