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기의 시작은 "어디 어디 가?"라는 질문부터
남편은 내가 "장 좀 보고 올게."라고 하면 무엇을 살지 보다 어디를 갈지부터 확인한다.
"어디 어디 가?"
내가 마트 이름을 하나둘 말하기 시작하면 마지막에 꼭 같은 질문을 한다.
"얼마나 걸려?"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난다.
미국에서 "장 좀 보고 올게."는 생각보다 간단한 일정이 아니다.
우리 집도 장을 보는 날이면 적게는 세 곳, 많게는 다섯 곳은 들른다. 코스트코에 갔다가 Trader Joe’s에 들르고, 한인마트를 거쳐 집 앞 마트까지 가는 날도 있다.
장보기 목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서로 돌아야 시간을 아낄 수 있는지, 냉동식품은 언제 사야 하는지까지 생각하며 동선을 짠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한국에서 막 오신 분들은 한 번쯤 의아할 수 있다.
'장을 한 번 보는데 왜 마트를 여러 군데 다녀야 하지?'
한국에서는 대부분 장을 한 번에 끝낸다. 대형마트 하나만 가도 식재료부터 생활용품까지 웬만한 것은 다 살 수 있다. 물론 시장을 가거나 정육점, 빵집을 따로 찾는 경우도 있지만, 평소 장보기는 한 번에 해결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미국은 조금 다르다.
물론 미국에도 한 곳에서 대부분 해결할 수 있는 대형마트가 있다. 다양한 유통업체들이 각자의 강점을 키우며 경쟁해 왔다. 어떤 곳은 가격으로, 어떤 곳은 유기농 식품으로, 어떤 곳은 자체 브랜드로, 어떤 곳은 대용량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가장 잘하는 마트는 드물다.
대신 각자 가장 잘하는 것은 분명하다.
코스트코는 대용량과 고기가 강하다. Trader Joe’s는 개성 있는 자체 브랜드와 냉동식품이 재미있다. Whole Foods는 신선한 유기농 식품을 찾는 사람들이 좋아한다. 한국 식재료만큼은 한인마트를 찾게 된다.
우리 집 바로 앞에도 Aldi, ShopRite, Lidl 같은 마트들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곳에서 얼마든지 장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가끔 차를 몰고 조금 더 멀리 있는 Trader Joe’s나 Whole Foods로 간다.
장보기에서 거리는 생각보다 큰 기준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것, 꼭 사고 싶은 것이 있는 곳이 목적지가 된다.
미국에서는 ‘어디가 가까운가’보다 ‘무엇을 사러 가는가’가 장보기 동선을 결정한다.
전에도 소개했던 빵값이 착해 늘 가는 마트가 있다. 그날도 빵만 사려고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내가 다른 마트에서만 사던 유기농 계란이 세일 중이다.
괜히 횡제 한 기분이 든다.
안 사도 될 빵 하나를 더 담는다. 계산 금액은 늘었는데 묘하게 절약한 기분이 든다.
마트는 물건만 파는 줄 알았는데 사람 마음도 꽤 잘 안다.
어떤 날은 계란을 사러 갔다가 블루베리를 사고, 블루베리를 사러 갔다가 꽃 한 다발을 들고 나온다. 정작 처음 사려고 했던 것은 다음 마트에서 산다.
미국에서 장보기는 쇼핑이라기보다 작은 보물 찾기에 가깝다.
같은 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어느 마트는 오전에 가야 덜 붐비고, 어느 곳은 다른 마트를 들른 뒤 가야 동선이 좋다는 걸 알게 된다. 어떤 순서로 돌아야 시간을 아낄 수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남편은 지금도 내가 외출 준비를 하면 먼저 묻는다.
"오늘은 어디 어디 가?"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한 다섯 군데?"
이제 그 말에는 서로 놀라지 않는다.
마지막 질문만큼은 여전히 대답하기 어렵다.
"얼마나 걸려?"
글쎄.
오늘은 빵만 사고 나올 수도 있고, 세일하는 계란을 만날 수도 있고, 예정에 없던 꽃을 들고 나올 수도 있으니까.
한국에서는 무엇을 살지가 먼저다.
미국에서는 어디부터 갈지가 먼저다.
장을 보는 방식도 그 나라의 생활 방식을 닮아 있다. 한국은 한 곳에서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데 익숙하다. 미국은 조금 더 움직이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가장 잘하는 곳에서 찾는다.
같은 장보기인데 나라가 달라지면 방식도 달라진다.
미국에서는 장바구니보다 먼저 동선이 생긴다.
마지막 봉지를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제야 오늘 장보기가 끝난다.
오늘도 여러 곳을 돌아왔지만, 결국 내가 가져온 것은 필요한 물건과 하루의 작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