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얼굴은 어디에 있나요?
오랜만에 이력서를 다시 만들었다. 경력과 학력, 자격 사항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문득 오래전 한국에서 만들었던 이력서가 떠올랐다.
지금과는 꽤 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사진이었다.
미국에서는 사진을 넣어본 적이 없다. 이름과 연락처, 경력, 학력, 기술과 자격 등을 적으면 이력서는 제 할 일을 다 한다. 얼굴은 없어도 된다.
한국에서는 조금 다르다. 오래전 내가 이력서를 만들던 때도 사진을 넣는 것이 거의 당연했고, 지금도 사진이 들어간 이력서가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사진이 없으면 뭔가 빠진 것 같은데, 미국에서는 사진이 있으면 오히려 난처하다.
인사과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사진이 붙어 있는 이력서를 받는다. 경력을 보려고 펼쳤는데 사진이 있으니 얼굴부터 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나이와 인상 같은 것까지 눈에 들어온다.
미국에서는 이런 불필요한 판단이 채용 과정에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적인 이력서에 사진을 넣지 않는 편이다. 사진이 없으면 일단 경력과 경험에 집중해서 볼 수 있다. 얼굴은 나중에 만나서 보면 된다.
일부 유럽에서는 이름이나 개인 정보를 가린 익명 이력서를 활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미국은 그래도 이름은 적는다. 얼굴은 안 보여주지만 '제가 누구인지는 알려드릴게요' 정도는 되는 셈이다.
한국과 미국, 여기에 유럽까지 살짝 들여다보고 나니 사람을 소개하는 방법도 참 제각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한국에서 이력서를 만들 때는 사진 한 장을 넣는 일이 이력서 작성의 중요한 과정이었다.
문제는 그 사진을 고르는 일이었다.
너무 오래된 사진은 안 되고, 너무 최근 사진도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활짝 웃으면 가벼워 보일 것 같고, 무표정이면 무서워 보일 것 같았다. 사진 한 장을 고르면서 내 얼굴과 꽤 오랜 시간 협상을 해야 했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받아 들고 집에 돌아와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잠시 후 다시 보면,
'아니,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싶었다.
이력서를 쓰는 건지, 내 얼굴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진 한 장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한다. 활짝 웃고 있으면 친절할 것 같고, 진지하면 꼼꼼할 것 같다. 헤어스타일만 보고도 대략적인 시대를 짐작할 수 있다.
증명사진은 참 억울하다. 사람은 하루에도 표정이 몇 번씩 바뀌는데, 사진 속 나는 한 가지 표정으로 몇 년을 살아야 한다. 그것도 가장 긴장한 얼굴로.
한국에서는 이력서를 펼치면 얼굴이 먼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렇게 생겼습니다.'
미국에서는 얼굴 대신 경력이 먼저 손을 내민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런 일을 해왔습니다.'
같은 사람을 소개하는데 한쪽은 얼굴부터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살아온 기록부터 보여주는 셈이다.
이번에 이력서를 다시 정리하면서 나도 내 경력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봤다. 그동안 해온 일을 하나씩 적다 보니 '내가 이런 일도 했었네' 싶었다.
사진을 고르던 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돌아보게 됐다. 얼굴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꺼내놓고 보니, 이력서가 단지 지원 서류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이력서 한 장에 사람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경력과 자격은 적을 수 있어도 그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까지 적기는 어렵다.
실제 면접을 보게 되면 그때 얼굴을 만난다.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력서에는 없던 유머도, 긴장하는 모습도, 생각하는 방식도 그때부터 조금씩 보인다.
결국 사람을 알아가는 데는 이력서 한 장보다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력서는 사람을 소개하는 순서가 조금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 이런 일을 해왔습니다'라고 소개하는 느낌이라면,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해온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먼저 소개하는 느낌이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을 소개하는 방식에도 그 슬롯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묻어 있는 것 같다.
미국식 이력서가 이제는 전혀 허전하지 않다. 사진은 없어도 된다. 얼굴은 면접에서 보여주면 되니까.
다만 한 가지는 조금 아쉽다.
한국식 이력서라면 잘 나온 사진 한 장으로 '그래도 나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미리 어필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그 기회조차 없다. 경력으로만 승부해야 한다.
사진보다 훨씬 냉정한 세상이다.
경력 다음에는, 사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