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물건도 자기소개를 한다
한국에서 사 온 손뜨개 수세미를 오래 썼다. 손에 익어 한국에 갈 때마다 일부러 넉넉히 사 와 쟁여두곤 했다. 가끔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한동안은 다른 제품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나씩 꺼내 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것까지 다 썼다. 미국에서 수세미를 사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늘 한국에서 가져온 것만 쓰다 보니, 이번에는 정말 오랜만에 미국 마트의 수세미 코너를 찾았다.
수세미 코너 앞에 서니 종류가 참 많았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수세미가 하나 있었다. 눈이 있고 입이 있었다.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까지 있었다.
Scrub Daddy.
한국에서라면 그냥 수세미다. 조금 더 설명하면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 그런데 이 수세미는 자기 이름을 당당하게 달고 있었다.
처음에는 웃겼다.
"수세미에게 아빠라는 이름이 붙어 있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집안이 꽤 크다. Scrub Mommy도 있고, Dish Daddy도 있고, BBQ Daddy도 있고, Eraser Daddy도 있다. 수세미 하나에 이름을 붙이더니 가족관계까지 만들어 놓았다.
수세미를 사러 왔다가 갑자기 한 가족을 만난 기분이다.
미국에는 이런 물건들이 또 있다. 청소용품 코너에는 Mr. Clean이라는 아저씨가 있다. 이름부터 Mr. 다. 청소를 잘하는 제품이라기보다 청소를 잘하는 아저씨 한 명이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커피도 생각났다.
미국에서는 커피 한 잔을 Joe라고 부르기도 한다.
A cup of Joe.
정확한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오래전부터 커피를 친근하게 부르던 표현으로 쓰여왔다고 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사람 이름 하나가 커피의 이름이 되었다.
수세미는 Scrub Daddy가 되고, 청소용품은 Mr. Clean이 되고, 커피는 Joe가 된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는 물건들이 자기 이름을 들고 나오는 것 같다.
마트에 들어갔는데 물건들이 하나씩 자기소개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저는 Scrub Daddy예요."
"저는 Mr. Clean입니다."
"저는 Joe예요.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이름이 붙으니 물건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수세미라고 생각하면 기능이 먼저 보인다. 설거지를 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Scrub Daddy라고 부르면 얼굴이 보인다. 아빠라는 캐릭터가 생기니 괜히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어느새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하는 아빠 한 사람이 겹쳐 보인다.
한국에서 물건을 부르는 방식은 꽤 담백하다. 밀대, 뒤집개, 빨래집게, 국자, 밀폐용기. 무엇을 하는 물건인지 알면 그걸로 충분하다. 굳이 이름까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예외는 있다.
자기 승용차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오래 탄 자전거에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애착이 가는 인형이나 악기에 이름을 지어주기도 한다.
우리 딸도 예전에 타던 차에 이름이 있었다. '까진이'였다. 차 앞부분이 살짝 까져 있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이름도 많았을 텐데, 하필 차의 흠집이 이름이 되었다.
딸이 그 차를 바꾸기 전까지 우리에게 그 차는 그냥 자동차가 아니라 '까진이'였다.
이름은 물건의 처음보다 함께한 시간 뒤에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오래 타고, 자주 보고, 작은 흠집 하나에도 이야기가 생기다 보면 어느 순간 그냥 자동차가 아니라 '까진이'가 된다.
미국의 수세미는 조금 달랐다. 함께하기도 전에 먼저 이름부터 내밀었다.
"나는 Scrub Daddy야."
물론 물건에 이름을 붙이는 건 기억하기 쉽게 만들고, 사고 싶게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그 방법이 꽤 효과가 있기는 했다.
그냥 수세미였으면 한 번 보고 지나쳤을 물건을 나는 그날 한참 들여다봤다. 이름을 알았고, 얼굴을 봤고, 가족관계까지 알아버렸다.
결국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면서 생각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손뜨개 수세미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도 오래 손에 익었고, 좋아했다. 이름이 없어도 애착은 생겼다.
우리 딸의 '까진이'도 처음부터 이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함께한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 속에서 이름이 생겼다. 어쩌면 이름이 애착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애착이 이름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Scrub Daddy.
아직은 조금 어색하다.
아무래도 나는 이름보다 함께한 시간이 먼저인 사람인가 보다.
뭐, 결국 정이 들면 거기서 거기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니 저희 집에도 '까진이'를 비롯해 이름을 가진 물건들이 꽤 많네요. 혹시 애착이 가는 물건에 붙여준 이름이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이름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