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렉 2

by명희진

그날 아침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몇 주째 기승을 부리는 더위 말고는.

마렉과 레나는 은퇴 후 꽤 오랫동안 같은 일상을 보냈다. 동갑인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은퇴했다. 두 번의 고관절 수술로 마렉은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그 때문에 마렉은 레나보다 조금 이른 은퇴를 했고 은퇴 후에는 병원을 가는 일 말고는 대부분 자신의 방에서 지냈다. 마렉과 레나는 오래전부터 방을 따로 썼다. 마렉의 방은 집의 가장 끝에 있었고 레나의 방은 현관 바로 옆에 있었다.

그의 방은 화장실과 욕실에서 가장 가까웠고 모퉁이 방이라 창문을 열면 도로가 바로 보였다. 그는 아주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 창문을 열고 지냈다. 차지 나는 소리나 지나는 사람들의 대화가 그대로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방에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게 있었다. 지친 몸을 뉘일 침대와 지루함을 달랠 텔레비전. 텔레비전을 마주한 안락한 소파 의자. 그는 주로 이 소파 의자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의자는 뒤로 젖혔다 펼 수 있었는데 그의 몸에 맞춰 엉덩이 부분이 움푹 들어가고 손잡이 부분에 가죽이 낡아 해져 있었다.

소파 의자 양옆으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창가에 가까운 긴 테이블에는 신문과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나온 잡지가 날짜별로 쌓여 있었고 반대쪽 라운드 테이블에는 돋보기와 각종 약병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장식장에는 손자, 손녀의 사진이 든 액자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이제 막 네 살이 된 막내 손녀가 유치원에서 쓴 그림 편지가 액자들 사이에 고정돼 있었다.


마렉 할아버지, 사랑해요.


동그라미에 콧수염을 그린 게 마렉과 제법 닮아 있었다. 오래전에 라파엘이 파리 여행을 하며 보낸 엽서도 그 옆에 있었다. 소파 의자 뒤로는 양탄자가 걸려 있었다. 먼지가 묻은 양탄자는 세월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낡았다. 마렉은 여행을 다니며 주물을 모았는데, 양탄자를 벽에 고정한 램프도 주물이었다. 그 아래 선반에는 그가 모은 주물이 박물관 관람실처럼 진열돼 있었다. 거기엔 한국인 며느리가 사다준 종 모양의 주물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매년 새해 전에 거리에 모여 그 종을 친다고 말할 때, 마렉은 며느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이해하게 됐다.

한국인 며느리를 얻을 때, 그는 마당 한편에 무궁화를 심었다. 아가와 라파엘의 소나무가 자라듯 며느리의 꽃나무도 성심껏 돌봤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무궁화가 꽃을 피웠고 며느리가 왔을 때, 모르는 척 함께 마당에 나갔다.

"어? 이 꽃은 무궁화네요."

"이게 한국의 국화라지?"

"어떻게 알았어요?"

"너를 위해 심었지."

그는 마치 이 말을 하려고 몇 해를 기다린 사람처럼 뿌듯해하며 콧수염을 만졌다. 며느리는 신기한 듯 무궁화 꽃을 바라보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그 후 무궁화 꽃나무는 매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나갔다 올게요."

오전에 레나는 마렉의 방문을 열고 빵과 신문을 사겠다고 말했다. 그는 더위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픈 몸 때문인지 숨통을 조여 오는 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올해는 더위가 더 기승을 부렸다. 레나가 마트에서 소형 선풍기를 사 왔지만 작동법을 몰라 문 뒤에 세워뒀다. 어제 아가가 왔을 때 선풍기 작동법을 물어봤으면 됐는데,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게 습관이 돼서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마렉과 레나는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고의 부모는 아니었지만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자부했다. 조용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가족이 무너지지 않게 자기 역할을 해왔지만, 나이가 드니 그게 맞은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그는 머리가 지끈 거렸고 그래서 그 생각을 깊이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방문을 닫는 레나를 향해 힘겹게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이내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에서는 역시나 유럽의 폭염과 환경오염에 대해 떠들어댔다. 몇 년째 같은 이야기였다. 뉴스는 언제나 세상이 이상하고 점점 더 나빠진다고 했지만 그가 젊을 때보다 세상은 더 살만했다. 문제는 욕심 많은 인간들이었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읽을 수 있는데도 마렉은 옛날사람처럼 종이로 된 신문을 고집했다. 그런 마렉에게 라파엘은 요새는 휴대전화로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마렉은 옛날 방식이 더 좋다고 고집을 부렸다. 쓸데없는 데 돈을 쓴다고 라파엘이 잔소리를 하면 "그깟 돈 얼마나 한다고!" 버럭 화를 내곤 했다. 그러면 라파엘은 소심해져 아버지 뜻 대로 하세요, 말하고 방문을 닫았다. 그런 식으로 대화를 끝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마렉은 어쩔 땐 자기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소리를 지르거나 윽박지를 마음은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가족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를 살피는 가족들을 보며 죄바카라감이 일어 부러 밝은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지만 겉돌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턴가 그가 나타나면 가족들은 하던 대화를 멈췄다. 그는 자신이 집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고 그러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했나, 싶은 서러운 마음이 일었다.


마렉은 화장실에 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쓰는 화장실은 그의 방 문을 열면 바로 오른쪽 옆에 있었다. 지팡이를 짚으려고 보니 지팡이는 소파의자 옆에 세워져 있었다. 지팡이를 가지러 거기까지 가는 거리와 화장실의 거리가 비슷했다. 평소라면 지팡이를 짚고 가는데, 그는 그냥 걷고 싶었다. 몇 발자국 되지도 않고 금방 다녀오면 될 것 같았다. 응차 소리를 내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식장을 짚고 그는 힘겹게 화장실까지 갔다. 자기 방 문고리에 의지해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비틀었다. 그때 푸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찍찍, 햄스터인 푸샤는 아가 가족이 휴가를 가며 맡기고 간 햄스터였다. 좁은 케이지에 갇힌 푸샤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좌변기 위에는 환자용 의자가 덧대 있어 앉기 편하게 돼 있었다. 그 옆에는 서랍장이 달려 있었고 서랍장 위에는 콧수염을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요제프 피우스트스키(Józef Piłsudski, 1867–1935)로 폴란드 독립 운동가였다. 그림 안에는 11 XI 1918 숫자가 있었는데, 이는 폴란드의 독립기념일이다. 사진 아래에 "WOLNA I NIEPODLEGŁA”글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폴란드."라는 뜻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콧수염을 길렀는데, 그건 그의 안에 폴란드 독립의 의지를 다지는 자신만의 작은 독립운동이었다. 그 위로는 "?? 27:1" (친EU·반PiS)로 폴란드를 상징하는 숫자가 보였다. 2017년 3월 9일 EU 정상들이 도날트 투스크(Donald Tusk)를 유럽이슬롯 의장으로 연임시키는 표결을 했는데, 당시 EU 28개국 가운데 27개국이 투스크 연임을 지지했다. 유일하게 반대한 나라가 그의 조국인 폴란드였다. 그래서 폴란드 야권에서는 27:1을 PiS 정부가 유럽에서 고립됐다는 상징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메시지 변기 뒤로는 창이 있었다. 창턱에는 선인장과 다육식물인 세네시오가 놓여 있었다. 작은 화장실조차도 그는 그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다.

끄응, 하는 신음을 뱉고 그는 화장실 앞에 섰다. 순간 불빛이 번쩍 일며 쿵 소리가 났다. 케이지 안의 푸샤가 물병을 치며 찍찍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마렉은 속으로 저놈의 쥐새끼가 뭔 일인가 싶었지만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예수스(Jezus)'

놀란 그가 평소처럼 소리를 냈지만,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뭔가 단단히 잘못된 걸 깨달았다. 평소 농담처럼 "그날이 올 거야.",라고 했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그날이 오고 말았다. 그는 레나를 간절히 찾았지만 그녀는 집에 없었다. 그가 평생을 보낸 집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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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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