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력은 배우는 게 아니다
드디어 딸이 게임할 수 있는 토요일이 돌아왔다.
내일 아침이면 바로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금요일 밤에 서둘러 잠을 청한 딸은 일어나자마자 부리나케 아침밥을 먹고 닌텐도 스위치 컨트롤러를 든 채 TV 앞에 앉았다. 주말에는 게임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이때만큼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게끔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딸은 오박사님으로부터 받았던 피카츄를 앞세워 꼬렛, 구구, 캐터피와 같은 기본 포켓몬들을 잡기 시작했다. 나는 딸의 효능감을 최대한 올려주기 위해 낮은 레벨의 포켓몬이라 할지라도, 포켓볼에 온갖 애니메이션 효과들과 함께 잡을 때면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골이라도 넣은 것처럼 옆에서 열심히 기뻐했다.
하지만, 어느새 지켜보던 얄팍한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이 게임을 여러 번 클리어한 나의 머릿속에는 나름의 전략과 공략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 받는 포켓몬이 전기 타입인 피카츄이다 보니, 전기 타입에 강한 바위 포켓몬을 보유하고 있는 회색 시티 체육관의 관장인 웅이와의 대결은 쉽지 않다는 것을 25년 전부터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회색 시티에 가는 길에 포획할 수 있는 캐터피나 구구를 얼른 성장시켜서 웅이를 꺾을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공식처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포켓몬 능력치나 레벨의 개념은 물론이거니와 진화에 대한 이해가 정확히 없는 딸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전략은 당연히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이런 내용을 입 밖으로 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딸이 계속 다양한 포켓몬들을 많이 잡거나, 포켓몬의 경험치를 가장 쉽게 올릴 수 있는 트레이너 대결을 피해서 다니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갑갑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한 마디씩 얹고 있었다.
“트레이너랑 대결해서 레벨을 올려야지!”
“지금 피카츄의 레벨 올릴 때가 아니야~”
이 모든 것은 나에게만 당연했고, 아직 게임에 적응되지 않아 집중하는 데 애를 쓰고 있던 딸의 귀에는 그저 잔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지적질은 끝날 줄 몰랐다.
“굳이 꼬렛을 왜 세 마리나 잡는 거야?”
내게 꼬렛은 그저 포켓몬 도감을 채우기 위해서 잡는 포켓몬에 불과했다. 커다란 앞니로 겨우 상대를 공격하는 ‘일반’ 타입의 포켓몬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계속 잡아대는 것인가 답답했고, 이미 잡은 꼬렛을 또 잡는 것은 나에게는 포켓볼 낭비로만 느껴졌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은 TV 화면으로라도 포켓몬을 잡는 것이 즐거웠기에 잡히는 포켓몬이 누가 됐든 간에 ‘갓챠(Gotcha)!’를 외칠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었다. 이때까지도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게임 방식을 은근슬쩍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횡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포켓몬 세상을 누비다 보면 포켓볼들이 땅바닥 구석구석에 널려있다. 나는 성격상 이런 공짜 아이템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게임 내 화폐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들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한 푼이라도 아껴놔야 나중에 진짜 필요할 때, 게임 안에서 돈을 화끈하게 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근면성실한 것이고, 안 좋게 얘기하면 거지근성이 가득했다. 이를 그럴싸한 용어로 ‘파밍(Farming)’이라고도 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딸에게도 이삭 줍듯 무료 아이템들을 수집하는 행위를 나처럼 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어차피 주는 건데 왜 안 줍고 지나가는 거야? 그냥 가서 버튼을 눌러!”
혼자만의 탐험으로 시작한 게임이 아빠가 이런저런 요청 사항들을 늘려가면서 점점 재미가 퇴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리모컨을 잡고 있는 사람의 입도 조금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게임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공짜로 주는 물약이 있는데 도대체 왜 그냥 가는 거야? 나중에 필요할 테니까 얼른 챙겨.”
결국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를 스포 하면서 딸이 알아가야 할 미지의 게임 세계를 사용자의 허락도 없이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딸에게 알아가는 재미를 빼앗아 가면서 내 초조함만 충족시키는 이기적이고 못난 어른이 되어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딸은 이해가 안 된다는 몸짓과 표정을 한껏 지었지만, 나의 잔소리가 성가셨는지 어쩔 수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 딸이 하는 게임을 구경하겠다고 시작했던 동행에 나의 잔소리가 끝없이 얹어지면서 누가 진짜 플레이어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게임의 진행 방식일 뿐이었고, 딸은 게임을 혼자서 알아가고 터득할 기회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요청하지 않은 나만의 하드캐리로 내가 첫 번째 위기라고 여겼던 회색 시티 체육관을 몇 번의 시도 끝에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요청해서 성장시킨 피카츄 이외의 포켓몬들(구구, 버터플 등)의 활약에 힘입어 첫 번째 체육관 배지를 획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딸이 웅이의 바위 포켓몬들에게 피카츄의 전기 공격을 신나게 했는데도 미미한 데미지만 가해지는 것을 보고 얻을 실망감과 거기서 이어질 트집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딸은 바위 포켓몬에게 전기 공격을 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도 모른 채로 회색 시티를 통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