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를 시험하려는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곤란한 질문이었습니다. 내라고 하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는 동전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는 말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우리는 이 말씀을 종교와 정치의 분리 정도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이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을 봅니다.

예수는 현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돈을 사용했고, 세금 문제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집에서 먹었고 잔치에도 갔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공동생활에는 돈궤가 있었고, 자기 재산으로 예수 일행을 돕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는 거지가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이 있었고, 머물 곳이 있었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에 불과했던 제자와 추종자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가진 것이 생겼다고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늘어났다고 그들 위에 올라서지 않았습니다.

권위가 생겼다고 그 권위로 사람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가이사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돈을 가지면서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

예수에게도 돈이 있었습니다.

예수 일행에게는 돈궤가 있었고, 누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를 비롯한 여러 여성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 일행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돈 자체를 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돈과 사람의 관계였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예수는 그의 재산을 문제 삼았습니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하자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예수를 만난 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은 일이 있다면 여러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는 그에게 말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사람을 가지고 있는가.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이 질문이 현실에서 얼마나 무서운 질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수많은 피해 신고와 오랜 소송이 이어졌고, 대법원은 2023년 한 피해자가 제조·판매업체를 상대로 제기한 사건에서 해당 제품의 결함과 손해배상바카라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야 직원에게 월급을 주고 회사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돈과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충돌할 때입니다.

그 순간 무엇을 포기합니까?

사람을 포기하고 돈을 지킨다면 돈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돈에게 지배당한 것입니다.

예수는 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돈보다 사람을 아래에 놓지 않았습니다.


권리가 있으면서 그것을 남을 짓누르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

예수에게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들이 따랐고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권위를 이상하게 사용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과 주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 그런데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짐을 지우기 쉽습니다.

예수의 권력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의 발을 씻었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반대의 장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2013년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남양유업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1,849개 대리점에 주문하지 않았거나 취급하지 않은 제품 등을 강제 할당했습니다.

수요예측 실패 등으로 발생한 초과생산과 재고의 부담이 더 약한 위치에 있는 대리점으로 넘어갔습니다.

본사가 대리점보다 힘이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힘을 어디에 사용했느냐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짐을 졌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힘으로 내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깁니다.

사장이기 때문에 시킬 수 있습니다.

상사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본사이기 때문에 조건을 정할 수 있습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강요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순종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권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를 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 힘으로 누구의 발을 씻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구에게 내 짐을 떠넘기고 있습니까?


현실의 제도를 이용하면서 약자의 몫을 탐하지 않는 것

예수는 안식일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보다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는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가복음은 예수가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슬퍼하며 노하여 둘러보았다고 기록합니다.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보다 제도 자체를 앞세우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철거민을 위한 특별공급이 있습니다.

저소득층을 위한 지원이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제도가 있습니다.

청년과 취약계층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리합니다.

제도의 취지를 보는 대신 자격요건을 봅니다.

그리고 빈틈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 주거가 충분히 확보된 사람이 명의를 가족이나 특수관계인에게 옮겨 조건을 맞춘 뒤 철거민 특별공급을 받고, 이후 다시 재산을 돌려받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구체적인 위법 여부는 사실관계와 적용 법률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질문은 위법 여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받을 수 있습니까?”

다음에 하나를 더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원래 누구를 위해 마련된 것입니까?”

법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모두 내 몫은 아닙니다.

가이사의 법을 통과했다고 하나님의 기준까지 통과한 것은 아닙니다.

법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예수는 그중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자기편의 잘못에도 화낼 수 있는 것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에게 데려왔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을 막았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그것을 보고 ‘노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막은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로마 군인도 아닙니다.

제자들입니다.

자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편이라고 감싸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대편 사람이 잘못하면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법대로 하라고 합니다.

사과하라고 합니다.

바카라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일이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 내가 속한 조직이나 교회에서 일어나면 갑자기 설명이 길어집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맥락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상대편은 더 심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잘못의 기준이 행동에서 사람으로 바뀝니다.

누가 했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집니다.

예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편이 잘못했을 때도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사람의 이름을 바꿔보십시오.

정당의 이름을 바꿔보십시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들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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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손해 볼 때보다 다른 사람이 짓밟힐 때 더 분노하는 것

예수의 분노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모욕당했을 때보다 다른 사람이 짓밟힐 때 더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그의 고통보다 예수를 고발할 생각만 하자 예수는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잡으러 사람들이 왔을 때는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도우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붙잡으러 온 쪽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가 그의 귀를 만져 고쳐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대편 사람이 다치는 것조차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슬롯의 모습은 때때로 정반대입니다.

2014년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에서는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었던 조현아 씨가 기내 서비스 문제로 승무원과 사무장을 질바카라하고 사무장을 항공기에서 내리게 한 행위 등이 문제가 됐습니다.

이후 대법원은 일부 혐의의 유죄를 확정했고, 항로변경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내가 불편했습니다.

내가 기분이 나빴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힘이 나보다 약한 사람을 향했습니다.

예수는 반대였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상황에서도 자기편이 휘두른 칼부터 멈췄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분노를 확인하는 질문도 간단합니다.

나는 내가 무시당했을 때 더 화가 납니까?

다른 사람이 짓밟힐 때 더 화가 납니까?


사람이 다쳤다면 내 의도를 변명하기 전에 그 사람을 보는 것

예수가 들려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길가에 쓰러져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묻지 않습니다.

왜 여기 왔습니까.

당신도 잘못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 그랬습니까.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그냥 봅니다.

다가갑니다.

상처를 싸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웁니다.

숙소로 데려갑니다.

비용까지 냅니다.

예수의 질문은 “누가 옳은가?”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누가 지금 쓰러져 있는가?”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순서가 자주 뒤집힙니다.

누군가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먼저 내 의도를 설명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의도는 중요합니다.

악의를 가지고 사람을 다치게 한 것과 의도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상처를 준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도가 없었다고 상처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실수로 내 발을 밟았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설명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와야 할 말이 있습니다.

“괜찮으세요?”

최근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작품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은 서로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논쟁과 별개로 작품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유족이 있다면 그 상처 자체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느 쪽의 역사 해석이 옳은지를 주장하는 것과 상처받은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상처를 받으셨다면 그 아픔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작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을 모두 철회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사람에게 먼저 갔습니다.


예수는 두 세계를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살았던 곳도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는 가이사가 지배하는 세계를 살았습니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세금이 있었습니다.

권력이 있었습니다.

빈부격차가 있었습니다.

종교권력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욕망과 배신과 질투도 있었습니다.

먹고살아야 했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현실 세계를 떠나 하나님 나라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가이사의 세계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삶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모범답안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모범답안을 가지고도 문제를 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은 외웁니다.

신학을 공부합니다.

교리를 배웁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합니다.

구원을 설명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처럼 살지는 않습니다.

신학과 교리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다만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신학적 지식은 예수의 삶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교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분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끝에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이 예수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교리가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 지식이 삶의 변화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수영에 관한 바카라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수영을 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예수를 공부하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러니 이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수가 보여준 이 여섯 가지 앞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돈을 가지면서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

권리가 있으면서 그것을 남을 짓누르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

현실의 제도를 이용하면서 약자의 몫을 탐하지 않는 것.

자기편의 잘못에도 화낼 수 있는 것.

자신이 손해 볼 때보다 다른 사람이 짓밟힐 때 더 분노하는 것.

사람이 다쳤다면 내 의도를 변명하기 전에 그 사람을 보는 것.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에 이 여섯 가지 가운데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까?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까?

내 몫과 남의 몫을 구별하게 되었습니까?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게 되었습니까?

내 억울함보다 다른 사람의 억울함이 보이기 시작했습니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처받은 사람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를 믿고 있는가.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되었느냐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느냐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가 옳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의 삶이 내 삶을 바꾸었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믿음도 겉으로는 믿음처럼 보입니다.

기도합니다.

찬양합니다.

예배드립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여, 주여” 부릅니다.

다만 삶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체계도 종교라는 제도도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훌륭한 종교인이 되는 방법을 보여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가이사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답을 하나 더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훌륭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푸십시오.

당신의 돈으로.

당신의 권리로.

당신의 지위로.

당신의 정치적 선택으로.

당신의 분노로.

당신의 양심으로.

당신의 삶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정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가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았던 방식으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세상을 떠나지 않은 채,

가이사의 것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직접 보여준 믿음입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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