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삼위일체 교리.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자신을 낮추십시오. 가진 것을 나누십시오. 약한 사람의 편에 서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가진 것까지 내어놓으십시오.
예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고,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정말 예수처럼 살 수 있을까요?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를 따르지 않아도 되는 너무 좋은 명분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니까 가능했죠.”
“하나님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죠.”
“저는 인간입니다.”
이 말이면 끝입니다.
예수가 처음부터 하나님이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습니다. 죽음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재물을 포기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똑같이 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나면 내게 무엇이 남을지도 모릅니다.
용서한 사람이 다시 나를 해칠지도 모릅니다.
옳다고 생각한 선택 때문에 온라인 게임을 잃을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 역시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했으니 너희도 해라.”
저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잖아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이면 높일수록 예수는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경배하기에는 좋은 존재가 되지만 따라가기에는 불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예수의 삶은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 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예수를 거부할 명분이 생깁니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이 지점에서 저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예수를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예수는 인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잠시 입고 세상에 내려온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선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낮추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래야 예수의 삶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한 인간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그의 삶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핑계를 대기 어려워집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어.”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한 인간이 우리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를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을 완성된 상태로 가지고 태어난 존재처럼만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눅 2:52)
히브리서는 더 놀라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 5:8)
배웠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굳이 다른 뜻으로 돌려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예수는 자랐습니다.
경험했습니다.
사람을 만났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더 깊이 이해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통로가 기도나 계시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에게서도 배웠습니다.
한 이방인 여인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나안 여인이고, 마가복음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소개됩니다.
딸이 고통받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처음 반응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조금 다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마 15:24)
예수에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경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이 계속 간청하자 예수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그의 딸은 낫습니다.
전통적인 해석 가운데는 예수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예수가 여인을 시험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 자신도 “내가 너를 시험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인간 예수가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뜻을 더 넓게 깨달은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사람에게 배웠습니다.
그것도 당시 종교와 슬롯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세워놓았던 경계 밖에 있던 이방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여기에서 예수의 위대함을 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군데 네 말을 듣느냐.”
“내가 하나님의 뜻을 너보다 잘 안다.”
“네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옳은 것을 발견했을 때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그 변화를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인을 인정합니다.
“네 믿음이 크다.”
저는 이것이 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한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옳은 것을 발견했을 때 그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부족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더 옳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자존심 때문에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부족함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착함과 선함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착한 사람은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싫어도 참습니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착함에 분별이 없으면 상대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선함은 다릅니다.
선함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내어주지만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계속 이용당하지는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돌아설 기회를 주지만 그 기회를 계속 악용한다면 떠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만 잘못을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하지만 그 사람의 욕심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착함은 상대의 요구를 봅니다.
선함은 그 요구가 옳은지를 봅니다.
예수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거절했습니다.
필요하면 떠났습니다.
필요하면 꾸짖었습니다.
필요하면 분노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그러나 선함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만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지도자들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을 알았습니다.
율법을 알았습니다.
전통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고통받아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규칙을 먼저 봅니다.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질서를 먼저 봅니다.
만약 예수가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나는 이스라엘에게만 보내졌다.”
“너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게 끝냈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비판했던 종교지도자들과 무엇이 달랐겠습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지키느라 눈앞의 사람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통해 더 넓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가능성을 닫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는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는 후자였습니다.
그런 예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이상해서 불편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에 불편했던 것입니다.
나누라는 말이 불편합니다.
약자의 몫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 불편합니다.
높아지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지 말라는 말이 불편합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이 불편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배웠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능력이라고 배웠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 현명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예수가 불편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마지막 하나를 건드립니다.
재산입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저는 이 장면이 두렵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욕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를 가짜라고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인정하면서도 예수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헌금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내 돈을 건드리면 어떻습니까?
내 성공을 건드리면 어떻습니까?
내 지위를 건드리면 어떻습니까?
내가 가진 특권을 건드리면 어떻습니까?
내가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몫을 가리키며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바로 그 순간 예수는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겟세마네의 예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기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 14:36)
저는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예수는 살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통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여기에 인간 예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이었다면 이 기도의 절박함은 이상해집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죽음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일까요?
저는 예수의 기도를 연극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실제 두려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살고 싶은 마음도 실제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도 실제 기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택도 실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선택할 필요가 없는 신이 예정된 일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선택은 위대합니다.
저는 예수의 위대함을 그가 하나님이었다는 데서 찾지 않습니다.
인간이면서 그렇게 살았다는 데서 찾습니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유혹을 이긴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싸운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겟세마네의 기도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는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는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바로 그래서 예수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그를 따르지 않을 훌륭한 명분이 생깁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한 인간이 그렇게 살았다면 그 변명은 힘을 잃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예수를 하나님과 연결하거나 신적인 언어로 고백하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은 하나님이셨다”고 시작하고,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그런 구절을 지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남습니다.
저는 그것을 예수에 대한 신앙의 고백으로 읽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나를 구해주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세월이 흐른 뒤 그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의 생물학적 정체가 실제 하나님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향해 사용한 신적인 언어 역시 이런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과도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고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는 사실과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이라는 명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둘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안에는 예수를 높이는 고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태어납니다.
자랍니다.
배웁니다.
배고파합니다.
목말라합니다.
피곤해서 잠듭니다.
슬퍼합니다.
웁니다.
고통스러워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절규합니다.
이 인간 예수를 몇몇 신적인 고백 때문에 지워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성경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이 인간 예수가 훨씬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자신의 삶을 맞춰갔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예수를 인간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더 쉽게 이해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변신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보여주고 돌아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인간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에게서 인간을 봅니다.
인간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 둘이 만나야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찾고 하나님의 공의를 자신의 삶으로 살아냈기 때문에 그에게서 하나님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고백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다.”
저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훨씬 놀랍습니다.
제가 믿고 따르고 싶은 예수는 모든 정답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자신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마침내 그 뜻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인간입니다.
선한 인간 예수입니다.
그 선함은 단순한 착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통하는 선함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욕심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약자를 품으면서도 권력자의 위선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으면서도 불의를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도 배웠습니다.
더 옳은 것을 발견하면 자신의 생각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예수를 작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만듭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니까 그렇게 살았죠.”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라면 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를 향해 그렇게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우리에게 던지는 말은 더 이상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불가능한 명령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여주는 길이 됩니다.
“나는 이렇게 걸었다.”
“너희도 걸을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우리에겐 그를 거부할 명분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이라면,
이제 우리의 삶이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 즉,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명확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중에는 이 교리가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이자
부활해서 하늘의 형상을 입은 첫 사람, 맏아들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독생자에서 맏아들로 바꿔서 설명합니다.
네.
우리는 그의 동생입니다.
이것이 제가 발견한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