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정말 손해입니까?

얼마 전 한 쌀과자 회사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전남 장성의 한 업체가 쌀과자 포장지에 독도가 포함된 한반도 지도를 넣었습니다.

일본 업체가 수입을 제안했습니다. 거래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독도 표시를 빼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는 거절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몰려가 제품을 샀습니다. 이른바 ‘돈쭐’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선택을 소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쭐이 아닙니다.

만약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일본 수출만 무산되고 정말 돈만 잃었다면요?

그래도 사장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나중에 물건을 사줄 것을 예상하고 거래를 거절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생길 손해도 자신이 감수했습니다.

소신은 이래야 합니다.


모든 손해가 손해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손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는 사실 손해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개발이나 철거로 실제 살 곳을 잃게 된 사람에게 특별공급의 기회를 주는 제도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철거되는 집 말고도 이미 다른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특별공급을 포기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몇억을 손해 봤네.”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 사람을 위해 마련된 혜택이 아니었다면 받지 않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집을 친척이나 특수관계인에게 넘겨 자격을 만든 뒤 특별공급을 받고, 나중에 다시 자기 명의로 돌려놓았다고 생각해봅시다.

구체적으로 어떤 법을 위반했는지는 법률가가 따질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 전에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원래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말 집을 잃고 살 곳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제도라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조건을 만들어 혜택을 받았다면, 법을 피했는지가 마지막 질문일 수 없습니다.

“불법은 아니잖아.”

그 말로 끝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나 때문에 탈락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혜택이 충분해서 모두가 받았다고 해도 질문은 남습니다.

나는 왜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우리는 ‘가질 수 있었는데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 쉽게 손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지 않는 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입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돈을 더 벌고 싶습니다.

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습니다.

욕망입니다.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몫까지 침범하기 시작하면 욕심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손해 보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이 진짜 손해이고 무엇이 욕심인지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은 선택입니다.

남의 것을 가져가지 않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남이 손해를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검찰개혁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여기서 검찰개혁 자체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2026년 10월 2일 검찰청이 폐지되고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 체제가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출범 직전까지도 새 기관의 수장, 인력, 시스템 등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는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피해까지 이미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측되는 피해입니다.

사건 처리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 혼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새로운 체계가 자리 잡을 때까지 국민이 불편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이 예상된다면 그때부터 정의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 그것이 옳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다음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것부터 준비했습니다.”

이 말입니다.

사건 지연이 예상된다면 지연을 최소화할 장치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수사 공백이 예상된다면 공백을 메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인력이 부족하다면 인력을 갖춰야 합니다.

기관 사이의 혼선이 예상된다면 바카라임과 절차를 분명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혼란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개혁을 결정한 정치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범죄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수사를 기다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국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평범한 시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합니다.

당신의 정의 때문에 누가 위험을 감수합니까?


소신은 내가 감수할 때 소신입니다

쌀과자 회사 사장은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정치인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국민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한다면 구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신은 내가 손해 볼 때 소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감수하라고 요구하려면 소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바카라임이 필요합니다.

피해를 예상했다면 줄여야 합니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먼저 준비할 수 있다면 준비해야 합니다.

“정의를 위해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너무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쩔 수 없는 피해’를 내가 입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희생으로 자신의 정의를 증명해서는 안 됩니다.


검찰만 개혁하면 되는 것입니까?

검찰 문제를 생각하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검찰 자체의 과도한 권한과 조직문화, 정치적 중립성 문제는 오랫동안 개혁 대상으로 지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검찰이 정치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 역시 검찰개혁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검찰이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아온 것이 문제였다면 검찰만 바꾸면 되는 것일까요?

검찰을 이용하려 했던 정치권력의 문제는 없습니까?

검찰이 권력의 시녀였다고 말한다면 두 존재가 있습니다.

시녀가 된 사람과,

시녀를 부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녀만 개혁하고 자신은 개혁의 주체로 서 있다면 이상합니다.

그래서 정치권력도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검찰의 권한을 줄이는 것만큼 정치권력이 수사기관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이 질문은 특정 정당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진 모든 정치세력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형제의 눈 속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사람은 이상하게 남을 개혁할 때 가장 정의로워집니다.

자신을 개혁할 때는 이유가 많아집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까?

최근에는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부에서는 영화가 박정희 정권이나 당시 권력기관이 사건의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며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반면 제작진은 실제 사건과 자료를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극영화이며,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하거나 특정한 역사적 결론을 사실로 제시한 작품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치권의 논쟁도 커졌습니다. 한쪽에서는 역사왜곡이라며 상영 중단과 제작진의 사과까지 요구했고, 다른 쪽에서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어느 편을 들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가정을 하나 해보고 싶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봅시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뀝니다.

평양의 어느 방입니다.

김일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광주의 참상을 찍은 사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흡족한 표정으로 웃습니다.

대사는 없습니다.

“북한이 5·18을 배후 조종했다”는 자막도 없습니다.

이 장면이 뜬금없는 장면일까요?

북한이 남한의 혼란을 즐긴다는 상상력. 개연성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말합니다.

“북한이 개입했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영화적 상상력입니다.”

“극영화입니다.”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잖아.”

5·18 피해자와 유족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암살자(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두 영화가 역사적으로 동일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우리의 기준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역사가 영화적 상상력으로 변형되었을 때는 역사왜곡이라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라면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면 역사왜곡에 엄격하면서 다른 역사적 사건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가고 싶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역사왜곡 가운데 무엇이 옳으냐를 따지기 전에 이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상처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유족과 관련 재단 측은 영화로 인해 고인과 유족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하며 제작진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과 육영재단 등이 공식 사과를 요구했고, 정치권에서도 같은 요구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저는 역사왜곡 여부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별개로 이미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작진은 그런 정치적 목적이 없었으며 사실을 왜곡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의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족에게 상처를 주려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가 없었다는 것과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내 행동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상처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때 새로운 선택이 시작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사과하면 손해입니까?

여기서 다시 처음 이야기했던 ‘손해’로 돌아옵니다.

감독이나 제작진이 유족에게 사과하면 무엇을 잃습니까?

영화가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표현의 자유를 반납합니까?

아닙니다.

자신들이 역사왜곡을 했다고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합니까?

그것 역시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화를 다시 찍어야 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창작 의도를 철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려는 의도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유족들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픔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게 패배입니까?

저는 오히려 대범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지키면서도 사람의 아픔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과를 너무 쉽게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사과하면 진다고 생각합니다.

내 주장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버팁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영화는 영화다.”

“표현의 자유다.”

하지만 사과는 언제나 자신의 잘못 전체를 인정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안할 수 있습니다.

내게 그 행동을 할 권리가 있었으면서도 미안할 수 있습니다.

악의가 전혀 없었으면서도 미안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다쳤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권리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 것일까요?

자존심입니까?

작품입니까?

정치적 진영입니까?

아니면 내가 옳다는 사실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물어야 합니다.

그게 정말 지켜야 할 내 몫입니까?


몰랐을 때와 알게 된 뒤는 다릅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유족에게 이런 상처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 논쟁으로 번질 것도 예상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유족이 상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뛰어들었습니다.

영화를 둘러싼 논란은 배우와 평론가에게까지 번졌습니다. 실제로 일부 배우의 무대인사 불참과 평론 영상 비공개 등으로 논쟁의 범위가 영화계 전반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러면 바카라임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몰랐을 때의 바카라임과 알게 된 뒤의 바카라임은 다릅니다.

몰랐을 때는 실수일 수 있습니다.

알게 된 뒤에는 선택입니다.

그때도 자신의 의도만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것인가.

더구나 상처받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그 사람의 아픔마저 정치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한쪽은 유족을 내세워 영화를 공격합니다.

다른 한쪽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영화를 방어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작 유족은 사라집니다.

사람의 상처가 진영의 무기가 됩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라면 누구에게 먼저 갔을까요?

저는 예수가 어느 진영의 논리가 더 정교한지를 먼저 따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길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에게 먼저 갔을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그렇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어느 민족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멈췄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이고 정의입니다.

검찰개혁에 찬성할 수 있습니다.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암살자(들)」을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왜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논쟁 사이에서 사람이 다칠 것 같다면 그 사람을 먼저 봐야 합니다.

이미 다쳤다면 더 간단합니다.

그 사람에게 먼저 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느 진영인지 확인하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5·18 피해자라서 가는 것도 아니고,

육영수 여사의 유족이라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보의 편에 서야 하는 것도 아니고 보수의 편에 서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받고, 밀려나고, 소외되고, 자기 힘으로 자신의 아픔을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의 곁에 서야 합니다.


그게 정말 손해입니까?.png



정의보다 사람이 먼저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정의를 말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정의 때문에 누가 다칩니까?

그 피해를 당신이 감수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감수합니까?

그것은 정말 당신의 손해입니까?

아니면 애초에 당신의 몫이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무엇을 내려놓았습니까?

당신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누군가 이미 상처받았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에게 가고 있습니까?

정의는 내가 옳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추는 것입니다.

돌아보는 것입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사람이 없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쳤다면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손해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남의 것을 가져가지 않는 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남에게 피해를 떠넘기지 않는 것도 손해가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내 행동으로 상처받은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 역시 손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보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이 진짜 손해인지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와 소신과 정의를 주장하는 동안에도 그 곁에서 쓰러지는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정의라는 말을 외치느라 사람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정의를 외치기 전에 한번 옆을 봐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외치는 동안,

누가 쓰러져 있습니까?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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