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가끔 전도지를 받습니다.
작은 전도지에 일회용 휴지가 붙어 있기도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받는 사람은 대부분 그냥 지나갑니다. 전도지를 읽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궁금합니다.
이게 정말 전도일까?
물론 예수를 알리는 일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를 소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경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복음을 설명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도의 전부라면 너무 이상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전도지 한 장을 건네며 말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묻고 싶지 않을까요.
“왜요?”
저는 오히려 전도지를 건네는 사람에게 먼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고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교회를 안 다니다가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헌금을 합니다.
기도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합니다.
술과 담배를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대부분 교회생활이 생겼다는 변화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까?
온라인 게임에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까?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게 되었습니까?
가진 것을 이전보다 쉽게 나누게 되었습니까?
높아지는 것보다 낮아지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가운데 다른 사람의 몫도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까?
예수를 믿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교회에 다니는 시간만 늘어났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상대방은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보니까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전도지보다 훨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성경은 모이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모여야 합니다.
함께 먹고, 서로의 삶을 나누고, 힘든 사람을 위로하고, 부족한 사람을 돕고,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다시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계속 모여 있기 위해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모였으면 다시 흩어져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흩어져서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전도지를 나눠줍니다.
예수 믿으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나오라고 권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설명합니다.
복음을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해 전달하기도 합니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 남으면 빈 껍데기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말로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였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밀려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보다 낮은 곳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의 전도에는 언제나 삶이 먼저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전도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궁금해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지?”
왜 손해를 보면서 저 사람의 편에 서지?
왜 자기 것도 많지 않은데 나누지?
왜 저 정도 위치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에게 저렇게 잘하지?
자기를 욕한 사람인데 왜 똑같이 갚지 않지?
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와주지?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라던데, 확실히 뭔가 다르네.”
“멋있다.”
그리고 어느 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삽니까?”
그때 이야기하면 됩니다.
“제가 믿는 예수가 그렇게 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전도지 한 장도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삶이 이미 전도지가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설명을 듣기도 전에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를 조금 보았습니다.
삶이 먼저입니다.
그 삶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러면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때 복음을 설명하면 됩니다.
삶, 감화, 질문, 그리고 복음.
그런데 우리는 자꾸 거꾸로 합니다.
복음을 설명합니다.
믿으라고 합니다.
교회에 데려옵니다.
등록시킵니다.
그리고 정작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착하게 살아서 저 사람을 감동시킨 다음 교회로 데려와야지.”
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선행이 전도의 기술이 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이유가 그 사람을 개종시키기 위해서라면 그것 역시 대가를 바라는 행동입니다.
물을 주는 이유는 그 사람이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밥을 주는 이유는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힘든 사람 곁에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혼자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돕습니다.
교회에 오든 오지 않든 나눕니다.
고맙다고 하든 하지 않든 함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면 누군가가 감동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르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전도는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해 예수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처럼 살았더니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성공을 숫자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몇 명에게 전도했습니까.
몇 명이 교회에 왔습니까.
몇 명이 등록했습니까.
몇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까.
물론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은요?
그 사람이 10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예배도 빠지지 않습니다.
헌금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직분도 받았습니다.
성경도 제법 압니다.
그런데 삶은 예수를 믿기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전도는 성공한 것입니까?
교회에 오래 다니는 것과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교회생활에 아주 익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찬송가를 알고,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교회 용어를 알고,
성경을 알고,
예배 순서를 알고,
어떻게 해야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지도 압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가면 이전과 똑같이 삽니다.
더 가지려고 합니다.
높아지려고 합니다.
강한 사람에게 붙고 약한 사람을 지나칩니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몫을 외면합니다.
원수를 미워합니다.
손해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따라 사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법을 배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공허해집니다.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매주 설교를 듣습니다.
봉사합니다.
헌금합니다.
성경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문득 묻게 됩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질문은 해봐야 합니다.
교회가 사람을 데려오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그 사람이 예수의 삶을 살아보게 하는 데는 실패한 것은 아닐까요.
예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해봅니다.
씨가 길가에 떨어집니다.
돌밭에도 떨어집니다.
가시떨기에도 떨어집니다.
좋은 땅에도 떨어집니다.
모두에게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하지만 뿌리가 없습니다.
가시떨기도 말씀을 받습니다.
심지어 자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좋은 땅은 다릅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에 전도의 기준이 있습니다.
씨를 받았느냐가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교회에 들어왔느냐도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했다고 말했느냐도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느냐도 아닙니다.
열매를 맺었느냐입니다.
예수를 알고 난 뒤 그 사람의 삶에 무엇이 생겼는가.
돈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까?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까?
약자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까?
자신의 것을 나누기 시작했습니까?
높아지기보다 낮아지기 시작했습니까?
원수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까?
자신의 욕심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까?
이것이 열매입니다.
교회도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올해 몇 명이 등록했습니까?”
그것만 묻지 말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씨를 얼마나 많이 뿌렸는지만 자랑하면서 열매가 없는 밭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씨 뿌리는 비유를 절반만 읽은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더 무서운 예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무서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압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합니다.
종교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고백과 종교적 행위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지금 우리의 전도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세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세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세요.”
“교회에 나오세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옵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찬양합니다.
기도합니다.
헌금합니다.
봉사합니다.
그런데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혹시 ‘주여, 주여’ 하는 사람만 계속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질문은 피하면 안 됩니다.
예수를 입으로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늘어났는데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늘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전도는 성공한 것입니까?
교회 등록자는 늘었는데 열매 맺는 사람은 늘지 않았다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라면 예수 자신의 경고와 충돌합니다.
예수가 원한 것은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전도의 목표도 달라져야 합니다.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삶이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결국 다시 회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입으로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가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옳다고 믿었다면 그의 방식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회개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은 예수를 만나기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데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만나라고 합니다.
나는 가진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따르라고 합니다.
나는 세상의 방식 그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전도지를 내밉니다.
“예수 믿으세요.”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전도지가 먼저가 아닙니다.
내 회개가 먼저입니다.
전도의 실패는 전도 방법의 실패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도지가 촌스러워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도 프로그램이 부족해서 교회에 사람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기 전에 보여주십시오.
예수를 믿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돈을 어떻게 다르게 쓰는지.
사람을 어떻게 다르게 대하는지.
약한 사람 곁에 어떻게 서는지.
자기 몫을 어떻게 나누는지.
어떻게 낮아지는지.
어떻게 용서하려고 애쓰는지.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지.
그러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때 이야기하십시오.
“왜 그렇게 삽니까?”
그 질문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전도의 완성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도 전도의 완성이 아닙니다.
씨를 뿌렸다면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모여서 예수를 배우십시오.
서로의 삶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흩어지십시오.
세상으로 나가 예수를 설명하기 전에 예수를 보여주십시오.
전도지를 나누기 전에 삶을 나누십시오.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기 전에, 예수를 믿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열심히 전도하면서도 정작 예수가 경고했던 사람들,
“주여, 주여”라고 부르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는 않는 사람들만 늘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전도라고 부르기 전에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예수의 길을 걷는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가.
전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대로 전도하자는 말입니다.
입으로 예수를 전하기 전에,
당신의 삶이 먼저 예수를 증언하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