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뺨도 내밀라'는 뜻을 오해하면 예수와 멀어집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예수의 말씀 가운데 이보다 많이 알려진 말씀도 드뭅니다.

그래서인지 뜻도 너무 쉽게 정해져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참아야 한다.
억울해도 참아야 한다.
누가 나를 때려도 맞서면 안 된다.
한 대 맞았으면 한 대 더 맞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이 말씀은 오랫동안 그런 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참으라고 합니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폭력을 당한 사람에게조차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는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오른뺨을 맞았으면 왼뺨까지 내밀어서 한 대 더 맞으라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이상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정작 그 말씀을 하신 예수는 자신이 맞았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는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예수가 대답하자 곁에 있던 경비병 하나가 예수의 뺨을 때립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예수는 다른 뺨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묻습니다.

“내가 잘못 말하였으면 그 잘못을 증언하여라. 그러나 내가 옳게 말하였다면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예수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침묵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나를 치느냐?”

이 장면이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라는 말씀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것은 두 번째 폭력을 허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폭력을 두 번째 폭력으로 돌려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쪽도 때리십시오.”

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겠습니다.”

입니다.

둘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예수는 저항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조금 더 읽어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누가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어주라고 합니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함께 가라고 합니다.

이것을 모두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이상해집니다.

나를 때리면 더 때리게 해주고,
내 것을 빼앗으려 하면 더 주고,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면 두 배로 해주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 셈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공통된 방향이 있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악을 행했다고 해서 나도 상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때렸지만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내 것을 빼앗으려 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당신의 것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오 리를 강요했지만 나는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으로 남지 않겠습니다.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라면 내가 선택해서 십 리를 함께 가겠습니다.

상대가 시작한 악이 내 행동까지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왼뺨을 내미는 것은 무저항이 아닙니다.

폭력적 보복의 거부입니다.

그리고 십 리를 동행하는 것은 굴복이 아닙니다.

강요로 시작된 관계를 자신의 선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는 악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악과 똑같은 방법으로 악과 싸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왜 겉옷까지 주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나를 때린 사람에게 되받아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예수는 왜 왼뺨까지 돌려대라고 했을까요?

속옷을 빼앗기지 않는 것으로 끝내면 될 텐데 왜 겉옷까지 주라고 했을까요?

오 리만 가도 되는데 왜 십 리를 가라고 했을까요?

저는 여기에 예수의 더 어려운 요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에게 돌아설 기회까지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속옷을 가지려 합니다.

그런데 내가 겉옷까지 내어줍니다.

정상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순간 멈칫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더 내어줍니다.

내가 이 사람을 때렸는데, 이 사람은 나를 때리지 않습니다.

내가 억지로 오 리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십 리를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 순간 상대는 자기 자신을 볼 기회를 얻습니다.

상대의 선함이 내 악함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이 떠오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중요한 것은 ‘악을 참으십시오’가 아닙니다.

‘악을 이기십시오’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악을 이기는 방식은 더 큰 악이 아닙니다.

선입니다.

어쩌면 왼뺨을 내미는 순간은 악에게 주는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당신도 여기에서 멈출 수 있다고.

당신도 돌아설 수 있다고.

당신이 나에게 악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나는 당신을 처음부터 악 그 자체로 규정하지 않겠다고.

한 번 더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강한 행동입니다.


'왼뺨도 내밀라'는 뜻을 오해하면 예수와 멀어집니다..png


그런데 상대가 겉옷까지 챙겨간다면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내가 속옷뿐 아니라 겉옷까지 내어주었더니 상대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웬 횡재야.’

‘이 사람 호구네.’

‘다음에도 이 사람에게서 빼앗으면 되겠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내어주어야 할까요?

다시 때리면 또 다른 뺨을 내밀고, 또 때리면 다시 내밀어야 할까요?

저는 그것 역시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면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않으면 그 집이나 성읍을 떠나면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욕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복수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붙잡고 변화시키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예수의 방식입니다.

선으로 대하십시오.

돌아설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선의마저 이용한다면 떠나십시오.

조용히 끊어내면 됩니다.

그를 미워하며 평생 복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나를 계속 이용하도록 내 삶을 내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는 악한 사람에게도 돌아설 기회를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설 때까지 계속 맞고 있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맞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악이 ‘나’를 향했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내 뺨입니다.

내 속옷입니다.

내 겉옷입니다.

내 시간입니다.

내 노동입니다.

내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옆 사람이 맞고 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뺨을 때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속옷을 빼앗으려 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오 리를 가라고 강요합니다.

그때 제가 피해자를 붙잡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참아야 합니다.”

“왼뺨도 내미십시오.”

“겉옷까지 주세요.”

“십 리까지 같이 가주십시오.”

이건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희생을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 뺨은 내가 내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뺨까지 내가 내밀 수는 없습니다.

내 겉옷은 내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겉옷까지 내가 대신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당한 악은 내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한 악까지 내가 대신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점에서 예수는 분노했습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 경계가 자주 무너집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용서를 말합니다.

가정에서 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참으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공동체를 위해 덮으라고 합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괴롭힘을 당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라고 하셨잖아요.”

아닙니다.

그 말씀은 제삼자가 피해자의 입을 막으라고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맞은 사람이 자신의 대응을 선택할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더구나 예수 자신은 맞았을 때 말했습니다.

“왜 나를 치느냐?”

그러므로 우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러십니까.

이것은 잘못됐습니다.

멈추십시오.

더 이상 만나지 않겠습니다.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신고하겠습니다.

법에 호소하겠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원수 사랑에 실패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는 보복하지 않았지만 불의를 불의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맞을 때와 남이 맞을 때는 다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맞고 있을 때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막았을 때 분개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규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외면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분노했습니다.

예수의 분노는 자기 자존심이 상했을 때보다 사람이 짓밟히고 있을 때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구별하고 싶습니다.

내가 맞았다면 보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맞고 있다면 그 폭력을 막아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았다면 내가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손해까지 제가 대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상처받았다면 내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제가 대신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피해자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왼뺨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이 말씀을

“한 대 맞았으면 한 대 더 맞아라.”

라고 이해하면 예수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맞고도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맞은 것이 옳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악을 방치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돌아설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이용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왼뺨을 내미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처럼 되지 않겠습니다.”

라는 선언입니다.

겉옷까지 내어주는 것은 호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나는 더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으로서 당신 자신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라는 질문입니다.

십 리를 동행하는 것도 굴복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강제로 움직이게 했지만, 여기서부터 내 행동은 당신의 강제가 아니라 나의 선택입니다.”

라는 선언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상대가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까지 내 바카라임은 아닙니다.

기회는 줄 수 있지만 변화까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끝내 자신의 악을 선택한다면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면 됩니다.

보복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고.

다시 이용당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가 말한 사랑은 끝없이 맞아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에게조차 한 번 더 사람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기회마저 짓밟는 사람에게 내 삶까지 계속 내어주는 사랑도 아닙니다.

왼뺨을 내민다는 것은 한 대 더 맞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 상대에게 묻는 것입니다.

당신도 이제 그만 때릴 수 있겠습니까?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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