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천국과 지옥은 언제부터 죽음의 목적지가 되었을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기독교인에게 물으면 대부분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예수를 믿었으면 천국, 믿지 않았으면 지옥. 여기에 가톨릭에서는 연옥이라는 개념도 등장한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 정화가 필요한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설명에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고 심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직 심판도 하지 않았는데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는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이미 천국과 지옥에 가 있다면 마지막 날의 심판은 왜 필요한 것일까?

판결도 내리지 않았는데 형벌부터 집행한다는 말인가?

어쩌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와 오랜 세월 교회가 가르쳐 온 사후세계를 혼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고 싶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구약성경에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 등장한다.

스올이다.

스올은 히브리어로 죽은 자들이 머무는 영역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고대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도 죽은 자들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죽음은 지상의 삶을 떠나 어둡고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에도 죽은 자들의 세계인 하데스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의 사후세계 관념은 시대에 따라 발전했고, 죽은 사람들의 처지에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나타났다.

고대 이스라엘 역시 이런 문화권 속에 있었다.

따라서 구약에 등장하는 스올이라는 개념은 당시 근동 사람들이 공유했던 죽음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언어와 문화, 지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상상했던 스올의 모습은 실제 죽은 자들의 세계와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스올이 정말 땅 아래에 있을까?

죽은 사람들이 지하의 어두운 공간에서 살아갈까?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올의 위치나 생김새가 아니다.

구약성경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떤 순서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순서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성경은 죽으면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가?

구약성경에서 죽은 사람은 스올로 내려간다.

악한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다. 선한 사람도 간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도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욥도 스올을 이야기했고, 시편의 저자들도 스올을 이야기했다.

그들이 모두 지옥에 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구약의 스올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최종적으로 나누어 보내는 천국이나 지옥과는 다르다.

그런데 구약의 이런 인식이 고대 근동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우리는 스올이라는 개념 자체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이 이해한 스올의 구체적인 모습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죽은 사람을 곧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보낸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올을 어떻게 상상했는지는 틀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한 성경에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사후세계의 구조, 곧 죽는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영원한 상벌을 받는다는 체계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죽음과 마지막 심판의 구별이다.

신약에서도 죽은 자들의 세계를 뜻하는 하데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하데스가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고 기록한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요한계시록 20:13)

여기서 음부가 하데스다.

죽은 자들이 머무는 세계가 그들을 내어준다.

그리고 심판이 이루어진다.

이 순서는 분명하다.

죽음이 있고, 마지막 심판이 있다.

그렇다면 죽는 순간 모든 판결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이 본문의 순서와는 맞지 않는다.

물론 신약에는 죽은 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를 암시하는 구절들도 있다. 누가복음 23장 43절, 빌립보서 1장 23절 등이 그렇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예외 없이 죽은 자들의 상태를 한 가지 방식으로만 설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성경에서 마지막 부활과 심판은 부차적인 절차가 아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것이 내가 사후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 연옥이라는 체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사후세계는 대체로 세 갈래다.

착하게 살거나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으로 간다.

악하게 살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

그리고 가톨릭에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 정화가 필요한 사람들의 상태인 연옥이 있다.

그런데 이런 체계가 구약성경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여러 해석이 발전했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한 철학적 관념도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생각, 죽은 직후 영혼이 어떤 판단을 받는다는 생각, 최후 심판 이전에도 의인과 악인의 처지가 달라진다는 생각이 점차 체계화되었다.

연옥 역시 이런 역사 속에서 발전한 개념이다.

다만 연옥이 구약의 스올에서 곧바로 이름만 바뀌어 탄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스올은 죽은 자들의 세계를 폭넓게 가리키는 개념인 반면, 가톨릭의 연옥은 최종적인 구원을 받을 사람이 정화되는 상태를 뜻한다.

연옥의 근거로는 마카베오기 하권 12장 43~46절에 나오는 죽은 자를 위한 속죄의 행위, 고린도전서 3장 15절의 불을 통한 구원 등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 구절들이 연옥의 존재를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하는지는 논쟁적이다.

특히 개신교는 마카베오기 하권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세 서방교회에 이르러 연옥 교리는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여기에 면벌부 문제가 결합했다.

면벌부는 본래 죄 자체를 돈으로 용서받는다는 교리가 아니다.

가톨릭의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이미 용서받은 죄에 남아 있는 잠벌의 면제를 뜻한다.

(잠벌(暫罰)은 가톨릭 교리에서 죄를 지어 고해성사로 죄 자체는 용서받았으나, 그 죄로 인해 발생한 질서의 훼손을 회복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한시적인 벌을 의미)


흔히 '면죄부'라고 부르지만 엄밀하게는 '면벌부'가 더 정확하다.

그러나 중세 말에는 면벌부의 발급과 금전적 기부가 결합하면서 심각한 남용이 발생했다.

죽은 가족이 연옥에서 겪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불안과 죄바카라감을 자극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돈을 내면 그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돈을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고, 그 세계에서의 고통을 덜어주는 권한까지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나는 이 역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은 뒤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해석이 어느 순간 종교적 권위와 경제적 이해관계에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중세의 면벌부 판매 때문에 처음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두 개념은 이미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 전통에 등장한다.

중세에 발전한 것은 그 개념들을 연결한 사후세계의 구체적인 체계와 연옥 교리, 그리고 그에 결부된 관행이었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단어의 존재가 아니다.

죽는 즉시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분류되고, 그 사이에 연옥이라는 별도의 정화 과정이 존재한다는 정교한 사후세계의 구조를 성경이 직접 제시한 것처럼 가르치는 일이다.

성경은 그렇게 상세한 사후세계의 지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는 오랜 세월 그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해 왔다.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무엘은 어디에서 올라왔을까?

구약성경에는 죽은 사람의 상태를 생각하게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에 빠졌다.

하나님께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이 금지했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여인은 놀라며 말한다.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무엘상 28:13)

사울이 어떤 모습이냐고 묻자 여인은 겉옷을 입은 노인이 올라온다고 대답한다.

사울은 그가 사무엘임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무엘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올라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세계를 땅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문화적 인식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는 말이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사무엘상 28:15)

사무엘은 자신이 불려 나온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은 사무엘은 아무런 의식도 없이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알아보고,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한다.

죽었다고 해서 기억과 인격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사건이 실제 사무엘의 출현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은 그 존재를 사무엘이라고 기록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죽은 자들의 세계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들은 자신이 흘린 피의 값을 기억한다

신약성경에는 사무엘의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요한계시록 6장이다.

다섯째 인을 떼자 제단 아래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들이 지킨 증언 때문에 죽임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큰 소리로 외친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요한계시록 6:10)

나는 이 구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지 않다.

자신들이 왜 죽었는지 기억한다. 자신들의 죽음이 부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는다.

언제 우리의 피값을 갚아 주실 것입니까?

여기서 피값은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한 대가, 곧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뜻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복수가 아니다. 자신들을 죽인 자들의 행위가 심판받고,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살아 있을 때 겪은 일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지고, 잠시 더 쉬라는 말씀이 전해진다. 그들과 같은 이유로 죽임당할 사람들이 더 있기 때문이다.

아직 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죽어 있다.

나는 이 장면이 죽음과 최후 심판 사이에 어떤 시간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환상으로 가득한 바카라이다.

제단 아래의 영혼들이 실제로 어느 장소에 모여 있는지, 흰 두루마기가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지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본문은 그 장소를 스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스올에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요한이 묘사한 죽은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며,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하신다.

나는 이 장면을 통해 죽은 자들의 세계가 단순히 의식 없이 잠들어 있는 곳만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png


스올에서도 모두 똑같이 지낼까?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대우를 받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하기 쉽게 재판을 떠올려 보자.

어떤 사람이 범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고 하자. 그렇다고 모든 피고인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다.

도주하거나 증거를 없앨 우려가 없는 사람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다.

반면 중대한 범죄 혐의가 있고 도주나 증거인멸의 위험이 큰 사람은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린다.

아직 유죄도 무죄도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의 처지는 다르다.

나는 스올도 이와 비슷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죽으면 스올로 간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날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그곳에서의 처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온 사람은 비교적 자유롭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착취하며 살아온 사람은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지고 쉬라는 말씀이 전해지는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들은 아직 최종적인 심판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의 억울함은 하나님 앞에서 외면당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이 스올의 운영 방식이나 처우 기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추론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최후 심판을 기다린다는 사실과,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서로 다른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모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최종 판결은 아니라는 점이다.

구속되었다고 반드시 유죄인 것은 아니다. 불구속되었다고 무죄가 확정된 것도 아니다.

최종적인 판단은 재판관이 내린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엘리야는 정말 죽지 않았을까?

성경에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엘리야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녹도 마찬가지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히브리서에는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나온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은 이들이 죽지 않은 채 하늘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예수의 말씀을 떠올린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3:13)

예수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열왕기하에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 두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하늘'이라는 표현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하늘은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을 뜻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역을 뜻하기도 한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기록은 그가 사람들의 눈앞에서 위로 사라졌다는 사건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엘리야가 하나님이 계신 영역에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일까?

나는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엘리야가 예수보다 먼저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올라가 있었다는 해석은 어려워진다.

물론 요한복음 3장 13절은 하늘의 일을 알고 증언할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문맥에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엘리야의 죽음 여부를 직접 판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엘리야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근거는 된다.

그렇다면 엘리야도 결국 죽은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야가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진 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죽었다고 확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인간이었던 엘리야가 죽음을 거쳐 죽은 자들의 세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성경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스올에 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다만 사무엘이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던 사람이라면, 그곳에서도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떤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들의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감금 장소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쉬고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제약을 받으며 지낼 수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예수는 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갔을까?

여기서 베드로전서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베드로전서 3:19)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그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존재들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옥'이 스올과 관련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원어는 다르다. 스올은 히브리어이고, 신약의 하데스는 그에 대응하는 그리스어다. 반면 베드로전서의 '옥'은 감금 장소를 뜻하는 '퓔라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성경이 이 세 표현을 언제나 동일한 장소의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올이 죽은 자들의 세계이고, 그 안에 자유가 제한된 영역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옥'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여지가 생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그곳에 갔을까?

무엇을 선포했을까?

베드로전서는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 선포가 복음이었는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언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갈린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4장 6절에는 또 다른 말씀이 나온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나는 이 구절이 무척 흥미롭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니.

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을까?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살았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

예수가 태어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 태어나 평생 예수라는 이름조차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의 세계에는 예수가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라면, 예수를 알 기회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차별하실 수 있을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달라진다면 그것이 과연 공정한 심판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전해질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했다는 기록은 그 가능성을 열어준다.

나는 예수가 단 한 번 무언가를 선포하고 모든 일을 끝냈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지금도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성경은 그가 지금도 계속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예수는 부활했다.

흙의 형상을 벗고 하늘의 형상을 입었다.

그는 제자들 곁을 떠났지만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지금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할 뿐이다.


죽은 뒤에도 회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죽은 뒤에도 복음을 듣는다면, 그 사람은 회개할 수 있을까?

나는 회개를 단순히 잘못했다고 말하는 행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가능하다면 피해를 바로잡는 일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어떻게 회개할 수 있을까?

이미 죽었으니 살아 있을 때 빼앗은 재산을 돌려줄 수도 없고, 자신이 해친 사람을 찾아가 사과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죽은 뒤에 잘못을 깨닫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면, 인간이 살아 있을 때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어떤 기회조차 얻지 못했는지를 모두 고려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올에서 복음을 듣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새롭게 알게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다시 이해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최후 심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성경이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면, 죽은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대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다.


마지막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사후세계에 관한 수많은 설명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붙잡아야 할 것이 마지막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죽은 자들이 심판대 앞에 서는 장면이 나온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요한계시록 20:13)

나는 이 구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대로 심판받는다.

어느 교회에 다녔는지, 어떤 교리를 암송했는지, 어떤 종교적 신분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가 심판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는 그날과 그때를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죽는 순간 하나님이 최종적인 판결을 모두 내리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사람은 죽는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 머문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심판받는다.

이것이 내가 구약의 스올과 신약의 하데스, 부활과 마지막 심판에 관한 기록을 연결하여 이해한 순서다.

스올의 구체적인 모습은 모른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사실만큼은 성경이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것이 사후세계에 대한 나의 이해에서 변하지 않는 중심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다

나는 천국에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앙을 보상과 처벌의 거래로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죽은 뒤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몰두한다면, 정작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놓칠 수 있다.

누군가를 착취하면서도 교회에 다니니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예수를 믿으니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예수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평생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우며 살아온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판단하실까?

나는 그 답을 인간이 미리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스올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다.

죽은 사무엘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엘리야가 어디에 있는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성경에는 죽은 자들이 존재하고, 기다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기록들이 있다.

나는 그 기록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록들보다 더 자세한 사후세계의 지도를 인간이 만들어 놓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확정된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 일을 경계한다.

죽은 뒤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를 지금 확신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이 마지막 날 내 삶을 심판하신다면, 나는 무엇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도, 스올도, 지옥도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끝내 그 뜻대로 살지 않은 자신의 삶일 것이다.

월, 금 연재
이전 21화예수는 다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