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단인가?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만들어낸 천국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죽은 사람이 찾아가는 하늘 어딘가의 장소라는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성경을 읽을수록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찾아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영광으로 임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부활하여 그 나라에서 살아가고,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그 나라를 맞이한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마치 인간의 최종 목적지가 죽음 이후의 두 장소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설명한다.
나는 묻고 싶다.
예수는 정말 그렇게 가르쳤는가?
그리고 예수가 가르친 것과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나는 그 말을 피하지 않겠다.
이단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주기도문을 보자.
마태복음 6장 10절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는 이 짧은 문장에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어디에 임하는가?
바로 이 땅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란 단순히 어떤 장소의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통치의 현실이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계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지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이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마침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인간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정의를 원하시지만 세상에는 불의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을 원하시지만 세상에는 증오가 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지만 세상에는 착취와 폭력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이 바뀐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예수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친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을까?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는 새 예루살렘이 등장한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방향을 보라.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내려온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선언한다.
나는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이 땅을 버리고 먼 하늘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시는 새로운 질서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다.
물론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장면을 문자 그대로 거대한 도시가 하늘에서 낙하하는 사건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환상으로 가득한 바카라이다.
그러나 그 상징이 가리키는 방향까지 뒤집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거처가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보여주는 방향과 교회가 강조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지 않은가?
이사야 65장 17절에서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21~22절에서 그 세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거기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천국이 얼마나 성경과 동떨어져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곳에도 집이 있다.
땅이 있다.
포도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다. 수확한 열매를 먹는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름 위에 앉아 영원히 찬송만 부르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살아간다. 일한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가꾸며 자신의 삶을 누린다.
그런데 지금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자신이 지은 집을 빼앗기지 않는다. 자신이 심은 열매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23절에서는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라지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노동을 착취하는 불의가 사라진다.
사실 노동은 인간이 죄를 짓기 전부터 존재했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도록 하셨다.
노동 자체가 저주는 아니었다. 죄 이후 인간의 노동이 고통과 허무에 짓눌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고통이 사라진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이해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일하고, 만들고, 가꾸고,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 눈물과 아픔이 그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행복한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온전히 실현되기 때문에 행복한 세계다.
교회가 흔히 가르치는 천국론에는 이상한 전제가 있다.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이다.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여기서 잠잔다는 것은 죽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하는 가능성도 이야기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도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주를 맞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분명하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영광으로 임하기 전에 이미 그 뜻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순간 반드시 죽어야 하는가?
아니다.
그대로 살아가며 그 나라를 맞이할 수 있다. 또는 바울의 말처럼 순식간에 변화할 수도 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부활한다.
고린도전서 15장 49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던 것처럼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죽은 영혼이 먼 하늘의 어느 장소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새로운 생명의 형상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이러한 부활의 소망 안에서 이해한다. 예수는 마태복음 8장 11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과 함께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의 경우에는 성경이 그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 말하므로, 그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든 엘리야든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이 단순히 죽은 영혼이 하늘의 어느 장소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활과 변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완성에 훨씬 가깝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이 땅 어딘가에 실제로 임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순간 미국이 사라지는가?
중국이 사라지는가?
세상의 모든 도시와 국가가 일시에 없어지고 모든 인간의 삶이 멈추는가?
성경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난 뒤에도 여러 민족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21장 24절에서는 만국이 새 예루살렘의 빛 가운데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온다고 말한다.
22장 2절에서는 생명나무의 잎사귀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 구절들이 오늘날의 국가들이 현재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여러 민족의 존재가 함께 묘사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된 뒤에도 그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 영광을 목격한다.
그리고 선택한다.
누군가는 회개한다.
누군가는 끝까지 거부한다.
하나님 나라가 눈앞에 나타났다고 해서 인간의 선택이 그 순간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9장 18절에서는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20~21절에서는 그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고 기록한다.
살인과 도둑질과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6장 9절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세가 드러나는 재앙을 겪으면서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비방한다.
나는 이 장면이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다르다.
자신의 권력과 탐욕을 포기하기 싫은 사람은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그 통치를 거부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7~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이후에도 민족들이 다시 미혹되어 반역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따라서 예수가 재림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순간 모든 인간의 선택과 심판이 한꺼번에 끝난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20장을 시간적 순서로 읽으면 통치의 기간과 마지막 반역, 최후의 심판이 구별된다.
고린도전서 15장 25~26절도 예수가 모든 원수를 굴복시킬 때까지 왕 노릇 하시며, 마지막에 멸망할 원수가 사망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통치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원수가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통치에는 과정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아직 자신의 삶이 남아 있다.
이사야 65장 20절은 흥미로운 말씀을 전한다.
백 세에 죽는 사람을 젊은 사람이라고 하고, 백 세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라고 한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는 다시는 죽음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누가복음 20장 35~36절에서 예수는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시 죽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서로 다른 생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후 함께 존재할 가능성을 생각한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하기 전에 죽었으나 부활하여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시 죽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살아 있다가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반면 그 영광을 보고서야 회개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남은 생애가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삶을 바꾼다면, 그 통치 아래에서 이전보다 훨씬 오래 살아갈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사야가 말한 백 세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 저주받은 사람들을 그러한 인간들과 연결해 읽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사야 65장은 이 세 집단을 직접 분류하지 않는다.
이사야의 장수에 관한 표현을 회복과 축복을 강조하는 예언적 언어로 읽을 수도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 21장의 죽음 없는 새 창조가 최종 완성의 상태를 묘사한다면, 그 이전의 통치 과정과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 여러 본문을 연결한 나의 해석이다.
하지만 적어도 성경이 부활한 사람의 불멸과 아직 죽을 수 있는 사람의 장수를 모두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차이를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마다 수명을 차등 지급하신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조건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였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과, 그 영광을 직접 보고서야 회개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의 선택은 같지 않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예수는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나는 이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 없이 믿으라는 뜻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아직 하나님의 정의가 온 세상에 실현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그 정의를 믿고 실천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착취가 만연한 세상에서 남을 착취하지 않는 사람.
폭력이 힘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사람.
거짓말이 이익이 되는 세상에서 진실을 선택하는 사람.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그 통치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반면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한 뒤 그 영광을 목격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다른 조건에서 선택한다.
나는 뒤늦은 회개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개는 늦게 이루어졌더라도 진실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진실을 아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의 선택과 그 나라를 직접 보고서야 회개한 사람들의 선택이 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이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시점에 부활하고 같은 역할을 맡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이 각 사람의 삶과 선택을 정확히 판단하신다면,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했는지도 고려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공의로운 심판이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면, 왜 다시 부활해야 하는가?
죽는 순간 이미 천국과 지옥으로 최종적인 운명이 결정된다면, 마지막 심판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죽은 영혼이 영원히 하늘에서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가?
왜 새 예루살렘은 내려오는가?
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쳤는가?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모두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교회는 죽음 이후의 중간 상태와 마지막 부활, 최후 심판을 함께 가르친다.
누가복음 23장 43절과 빌립보서 1장 23절처럼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상태를 암시하는 본문도 있다.
나는 그러한 구절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어떤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구원의 최종 목적지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문제는 교회가 실제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중심에 놓고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부활과 새 창조를 교리의 한쪽 구석에 남겨 놓으면서, 정작 신앙의 목적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반복한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믿게 되겠는가?
죽음 이후의 장소가 구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뒷전으로 밀린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일보다 내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일이 중요해진다.
신앙은 하나님의 통치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이 아니라 사후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의 천국론이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나를 이단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오랫동안 교회가 가르쳐 온 천국론과 내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묻겠다.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은 정통으로 삼는 가르침에서 벗어난 다른 가르침을 뜻한다.
그렇다면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이 정통이냐는 것이다.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 왔으므로 정통인가?
수많은 사람이 믿으므로 정통인가?
거대한 예배당을 세우고 수천 년의 역사를 가졌으므로 정통인가?
아니다.
백만 명이 믿는다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십억 명이 믿는다고 성경에 없는 말이 성경의 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기준이 교회의 전통이라면 내가 이단일 것이다.
그러나 기준이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어떠한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교회는 죽어서 천국에 가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쳤다.
교회는 죽은 뒤 영혼이 어디로 가는가를 신앙의 중심에 놓는다.
성경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기록했다.
교회는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포도나무를 심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의 삶과 단절된 사후 세계처럼 묘사한다.
물론 이 대비가 모든 교회의 공식 교리를 빠짐없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은 하나님 나라를 사후의 목적지로 대체하고 부활과 새 창조를 사실상 주변으로 밀어낸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널리 퍼져 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예수가 가르친 것과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단 아닌가?
교회가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회의 자유다.
하지만 교회가 이단이라고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틀렸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교회가 자신을 정통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그 선언에 동의하시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를 묻는다.
하나님과 예수가 가르친 것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죽은 영혼의 사후 목적지로 바꾸어 가르치는 기독교야말로 이단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최종 판결을 대신 내린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내세우는 판단의 기준이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 기준을 끝까지 적용한다면, 다수의 이름으로 정통을 주장하는 교회도 심판의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
그러나 죽어서 그곳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영광으로 임할 날을 기다린다.
그날이 오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은 그 나라를 맞이할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부활하여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영광을 보고서야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역사가 단 한순간에 끝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마지막 반역, 죽음의 최종적인 소멸을 함께 이야기한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의 정확한 시기와 방식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이 가리키는 방향만큼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죽어서 찾아가는 하늘의 별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영광으로 임하여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두며, 자신이 수고한 결과를 누린다.
누군가가 그 결실을 빼앗지 않는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짓밟지 않는다.
서로 해치지 않는다.
눈물과 고통이 사라지고, 마침내 죽음마저 사라진다.
이것이 내가 성경에서 발견한 하나님 나라다.
그리고 이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 그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착취가 사라진다면 지금 착취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폭력이 사라진다면 지금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정의가 실현된다면 지금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면 지금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일이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기 위해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먼저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교회가 나를 이단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판정을 받는 일이 아니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를 외면한 채, 교회가 만들어낸 천국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일이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그 답을 결정하는 것은 교회의 숫자도, 역사도, 권위도 아니다.
기준은 하나님이다.
기준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기록한 성경이다.
그 기준 앞에서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정통이라고 가장 크게 외치는 교회부터 물어야 한다.
당신들이 가르치는 천국은 정말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