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다
나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심판하실까?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배운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정작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무엇을 판단하신다고 말하는가?
요한계시록 20장 12~13절에는 죽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 2장 6절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 역시 각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행한 선악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기록한다.
예수도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서 예수는 인자가 올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는 그 기준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가? 나그네를 영접했는가?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혔는가? 병든 사람과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았는가?
놀랍게도 예수는 그들이 어느 교회에 다녔는지 묻지 않는다.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는 사실을 믿었는지 묻지도 않는다. 자신을 구주로 고백했는지도 묻지 않는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묻는다.
물론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도 있다. 그렇다면 믿음과 행위는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쉽게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는 매우 과격한 말을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는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문제 삼는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말한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은 도저히 죄를 피할 수 없다.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름다운 사람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남이 가진 좋은 물건을 보고 갖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감정이 생기는 순간 죄인이 된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죄를 짓는 존재가 된다.
죄를 짓지 않으려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욕망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정말 그런 것일까?
나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20절에서는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그다음에 살인과 분노, 간음과 음욕에 관한 말씀이 이어진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의로움이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간음하지 않았으니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질문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의로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향해 품었던 분노와 증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당신은 간음하지 않았으니 의로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마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수는 율법의 논리를 더욱 엄격하게 밀어붙인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 기준으로도 당신은 완전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예수가 마음속 감정까지 새로운 범죄로 규정하고, 인간에게 더 무거운 형벌을 부과하려 했다는 뜻으로 읽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을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가르침으로 읽는다.
물론 예수는 인간의 마음과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마음속에 품은 증오가 아무런 윤리적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에 떠오른 감정과 그 감정을 따라 실제로 저지른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그 구별을 하지 않으면 예수가 다른 곳에서 보여준 행동조차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마가복음 2장에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는 그들에게 말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마가복음 2:27)
나는 이 말씀이 예수의 율법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쉼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굶주린 사람이 먹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병든 사람이 치료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규정이 오히려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마가복음 3장에서는 손이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진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4)
예수는 단순히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지를 묻지 않는다. 선을 행할 것인가, 악을 행할 것인가를 묻는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다.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치료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을 지켰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병자는 고통 속에 남겨졌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것일까?
예수의 대답은 분명하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예수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규정을 지켰다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 규정을 통해 이루려 했던 자비와 정의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지켰다는 이유로 사람을 외면했다면, 바로 그 외면한 행위가 문제가 된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는 그 사람이 몹시 싫다. 얼굴도 보기 싫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 어쩌면 평생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크게 다쳤다. 주변에는 나밖에 없다. 나는 그를 돕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해 준다. 병원으로 데려간다. 그가 살아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실까?
내가 그 사람을 미워했다는 마음일까? 아니면 그 미움을 뒤로하고 그를 도왔다는 행위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사람을 미워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행위의 의미는 더욱 커질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을 돕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싫어하는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거슬러 내려야 하는 선택이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누가복음 6장 27절에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선대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는 원수를 좋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원수에 대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도 않는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라고 한다.
사랑은 반드시 따뜻한 감정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싫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필요한 일을 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병자를 보고 몹시 불쌍하게 여긴다. 마음속으로는 진심으로 그가 낫기를 바란다.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치료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미워하면서도 도왔고, 다른 사람은 불쌍히 여기면서도 돕지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아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미움도 알고 동정심도 아신다.
그러나 그 마음속 갈등 끝에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고 실행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움을 준 행위와 도움을 주지 않은 행위는 같지 않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겟세마네의 예수를 떠올린다.
예수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예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했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바람이 마음에 생기는 것 자체가 죄라면, 우리는 이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바람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곧바로 불순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을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십자가를 받아들였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이를 죽기까지 순종한 행위로 설명한다.
예수의 순종은 죽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데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도왔다고 해서 그 행위의 가치가 사라질 이유는 무엇인가?
하기 싫었지만 했다. 두려웠지만 감당했다. 손해를 보기 싫었지만 정당한 일을 선택했다.
나는 바로 그런 선택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 갈등까지 아실 것이다.
그리고 그 갈등을 넘어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아실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8~32절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한다. 첫째는 싫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간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는다.
예수는 묻는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마태복음 21:31)
대답은 첫째 아들이다.
나는 이 비유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문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첫째 아들은 처음부터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뜻을 행했다.
둘째 아들은 순종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예수는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는지 묻는다. 누가 더 공손하게 대답했는지 묻지 않는다.
물론 첫째 아들은 나중에 뉘우쳤다.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만약 첫째 아들이 뉘우치기만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면, 예수의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비유가 더욱 날카로운 이유는 예수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상대로 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어서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종교적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들과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위치를 뒤집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그 뜻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다르다.
이 비유를 오늘날의 기독교에 적용하면 어떨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예수를 구주라고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을 돕고, 약자를 보호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 중 누가 예수의 삶을 더 닮았는가?
두 아들의 비유가 예수를 알지 못했던 모든 사람의 구원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적 고백과 실제 행동이 충돌할 때 예수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는 말보다 행위를 보았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는다고 하면서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존중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어떤 존재였는지에 관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행위다.
예수는 굶주린 사람을 먹였다. 병든 사람을 돌보았다. 슬롯적으로 배척받던 사람들과 함께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긴 뒤 자신이 행한 것처럼 그들도 행하라고 말했다(요한복음 13:15).
요한일서 2장 6절도 예수 안에 산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가 행한 대로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부르고 싶다.
믿음과 행위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믿음이 있다면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 믿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는 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온 삶을 통해 그 믿음을 판단하신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예수와 얼마나 닮았는가?
바로 그것을 보신다는 것이다.
한 사업가가 있다고 하자.
그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다.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월요일이 되면 직원들에게 폭언한다. 정당한 급여를 제때 지급하지 않는다.
직원이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해도 외면한다.
그리고 다음 일요일에 다시 교회에 가서 회개한다.
그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나는 그가 교회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 월요일에 직원들에게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야고보서 5장 4절은 노동자에게 지급하지 않은 품삯이 소리 지르며, 그 외침이 하나님께 들린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다.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의 호소도 들으시는 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회개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잘못을 저질렀다. 교회에 가서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 다시 깨끗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고통받은 직원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지급하지 않은 급여는 어떻게 되는가?
반복된 폭언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회개했다고 해서 그 일들이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
직원을 괴롭히는 일을 멈추고, 밀린 급여를 지급하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뒤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갚겠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누가복음 19:8).
그런데 교회에 가서 용서받았다는 이유로 이전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 회개는 무엇을 바꾸었는가?
나는 여기서 예수가 말한 넓은 문과 좁은 문을 생각한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고 말한다.
그 말씀 뒤에는 열매로 사람을 알아보라는 가르침이 이어진다.
그리고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 흐름을 보면 넓은 문과 좁은 문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로 구별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나는 오늘날 기독교가 스스로 넓은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교회에 다니면 된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 된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
그렇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예수처럼 살아가려면 불편해진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공정하게 행동해야 한다. 미워하는 사람도 도와야 한다.
약자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말로 예수를 믿는 것은 쉬울 수 있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나는 예수가 경고한 좁은 길이 바로 그 어려운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라는 이름 자체가 넓은 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안심시키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넓은 문을 가르치는 신앙이 아닐까?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하나 생긴다.
평생 나쁜 짓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착취했다.
그러다가 큰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는 진심으로 후회한다.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싶다.
다시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전과 다르게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며칠 뒤 죽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심판하실까?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대로라면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변화된 삶을 실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회개가 아무 의미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누가복음 23장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받는 처벌을 인정하고, 예수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예수는 그에게 낙원을 약속한다.
이 장면은 죽음 직전에도 돌이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그 죄수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예수를 조롱하는 다른 죄수를 꾸짖었으며, 예수가 부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변화된 태도를 실제로 드러냈다.
그렇다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은 어떨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인간이 섣불리 판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면 그 회개가 진심인지 아닌지도 아신다.
죽음이 두려워 형벌을 피하려는 말인지,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깨닫고 돌이킨 것인지 정확히 아신다.
만약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하나님은 이미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회개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께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다만 회개가 진실하다는 사실과 과거의 바카라임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구별해야 한다.
그 사람이 진심으로 뉘우쳤다고 해서 피해자가 겪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그가 살아온 삶 역시 판단의 대상이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가 마지막 순간에 진심으로 돌이켰다는 사실도 아실 것이다.
에스겔 18장은 악인이 자신의 악행에서 돌이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악행만이 아니라 돌이킨 이후의 삶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죽기 직전 회개하여 행동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 그 말씀이 정확히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이 빈자리를 인간이 만든 확신으로 채우고 싶지 않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과거도 아시고, 마지막 회개의 진실성도 아신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사정까지 아신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
따라서 죽기 직전 회개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변화된 삶을 보여주지 못했으니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다.
다만 살아갈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우리에게는 분명한 바카라임이 있다.
지금 돌이킬 수 있다면 지금 돌이켜야 한다.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지금 바로잡아야 한다.
언젠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이용하려는 계산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계산에도 속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마지막 심판을 생각할 때 두 아들의 비유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포도원에 가겠다는 대답을 듣고 기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아들은 가지 않았다.
반대로 포도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아들은 결국 갔다.
예수는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는지 물었다.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는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했는가? 교회에서 회개했는가?
그렇다면 그 믿음과 회개는 당신의 삶에서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당신이 고용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 당신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했는가? 당신 앞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가?
나는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보실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도 아신다.
누군가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무엇을 탐냈는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도 아신다.
그러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정만으로 그 사람의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미워하면서도 도울 수 있다. 두려워하면서도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외면할 수도 있다. 정의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불의에 가담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다.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죽음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첫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갔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마음에 갈등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갈등 속에서도 무엇을 선택하고 실행했는가 하는 문제다.
나는 믿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자비와 정의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믿음은 현실에 나타난다.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이 믿음을 보신다면, 나는 그 믿음을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찾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삶이 얼마나 예수를 닮았는지 보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지막 날 두려워해야 할 질문은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는가?'가 아니다.
'나는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살았는가?'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교회 출석이나 신앙고백을 자신의 삶을 대신할 증거로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다. 마음을 모르시는 분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원했는지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가 무엇을 행했는지를 물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행위에 따른 심판이며, 믿음에 대한 심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