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의 편일까?
기독교인의 편일까? 예수를 믿는 사람의 편일까?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의 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하나님이기 이전에 온 세상의 창조주다.
기독교인이든 불교 신자든 무신론자든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쉽게 자기편으로 만든다.
전쟁을 벌이는 나라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승리를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한다고 말한다.
사업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사업을 번창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를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한다.
모두가 하나님을 찾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그들의 편일까?
나는 이 질문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진영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다.
주인이 어째서 자기 집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의 편이냐가 아니라,인간들이 주인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하나님 나라다
기독교에서는 흔히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곳처럼 이야기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창조주에게 하나님 나라가 아닌 곳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하늘과 땅,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이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을 찬양하든 부정하든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밖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세계가 하나님 나라다.
그렇다고 지금의 세계가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지금의 상태를 주인이 잠시 집을 비운 상황에 비유하고 싶다.
주인은 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갈 규칙을 정해 놓았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약한 사람을 돌보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자유를 외치고,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외치고, 누군가는 자본과 시장을 앞세운다.
자기들끼리 편을 가르고, 이합집산하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
자유를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짓밟는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소수를 억압한다.
부를 창출한다면서 남의 몫까지 독차지한다. 평화를 지키겠다면서 전쟁을 벌인다.
물론 자유와 민주주의, 자본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삶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인간이 만든 어떤 제도와 이념도 주인이 정한 사랑과 정의의 원칙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만든 규칙을 절대적인 것처럼 떠받든다.
주인의 집에서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고 세상이 타락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타락하지 않았다.
주인이 부재중인 상태에서 주인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인간들이 많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남의 몫을 빼앗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몫을 나눈다.
누군가는 전쟁을 일으키지만, 누군가는 전쟁을 막으려 한다.
누군가는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만, 누군가는 그들의 곁을 지킨다.
모두 같은 집에서 살아간다. 다만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타락한 세상이라는 두 개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하나님 나라 안에서 주인의 뜻을 지키는 사람과 거스르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인이 돌아오는 날
주인은 영원히 부재중이지 않다.
언젠가 돌아온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주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무엇이 자신의 뜻이었는지 온 세상에 명명백백 밝힐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더 이상 주인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규칙을 정했는지 두고 다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은 자신이 없는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볼 것이다.
주인의 집을 돌본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집을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들을 괴롭힌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바카라임을 물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심판이다.
심판은 하나님을 믿었는지 확인하는 종교 시험이 아니다. 주인의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주인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예수가 다시 온다고 믿고, 그날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지금의 삶을 바꾸지 않는가?
주인이 내일 돌아올 수도 있다. 오늘 밤 돌아올 수도 있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이 어지럽힌 것을 치우고, 잘못한 일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내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누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회개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 내일이 계속 미뤄진다.
처음에는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다.
그러다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죄바카라감도 무뎌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진다.
더구나 주인의 규칙을 어기며 사는 편이 당장은 편하고 유리하다.
남의 몫을 남겨두려면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내 시간과 재산을 내놓아야 한다.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돌려주려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려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반면 주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쉽다.
주인이 돌아온다고 말하는 것도 쉽다.
그래서 입술로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실제로는 주인이 조금만 더 늦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료들을 때리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종을 이야기한다.
그 종은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주인이 늦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주인이 돌아와도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회개하지 않고 회개하는 방법
이렇게 살다 보면 진짜 회개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온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남의 것을 빼앗았다면 돌려줘야 한다. 누군가를 억압했다면 그 일을 멈춰야 한다.
상처를 입혔다면 사과하고, 가능한 한 피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 누려온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쉬운 방법을 찾는다.
입술로 회개하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기도하면서 용서를 구한다.
눈물을 흘리고, 은혜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 문을 나서면 다시 이전과 똑같이 살아간다.
다음 주에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것은 회개일까?
주인의 집을 어지럽힌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날마다 주인의 사진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주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일어나 다시 집을 어지럽힌다.
다음 날에는 더 간절하게 용서를 구한다. 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집은 갈수록 엉망이 된다.
그가 정말 잘못을 뉘우친 것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집을 치우는 일이다.
망가뜨린 것을 고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용서받았다는 확신만 얻으려 한다.
가짜 회개는 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바카라감을 버리는 것이다.
진짜 회개는 다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된 행동을 멈추며,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삭개오를 보자.
그는 예수를 만난 뒤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한다.
삭개오가 장황한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일까? 예수의 신성을 정확하게 이해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의 삶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이익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것이 회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회개가 지나치게 쉬워진 것처럼 보인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는 회개했다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정작 그들의 삶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교회가 진짜 회개를 요구하기보다 회개하지 않아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면, 종교는 인간의 탐욕을 멈추게 하는 힘이 아니라 탐욕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이것이 내가 값싼 회개를 경계하는 이유다.
주인에게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회개가 입술에 머물면 기도도 달라진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다.
돈을 더 벌게 해달라. 사업을 성공하게 해달라. 경쟁에서 이기게 해달라.
좋은 집을 갖게 해달라.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해달라.
주인이 정한 규칙을 지키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주인의 집에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앞선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거나 병든 가족의 회복을 바라는 기도까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필요한 것이 있고, 고통 속에서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문제는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는 태도다.
예수는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는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문에서 먼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다음이 일용할 양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자신을 바꾸기보다 자신의 뜻에 맞게 하나님이 움직여 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주인이 왜 밭 모퉁이를 남겨두라고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레위기 19장에는 밭의 모퉁이까지 모조리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과 열매를 남겨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 가져갈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나는 이 말씀이 참 좋다.
자신이 거둘 수 있는 것을 모두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남는 것이 있으면 베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몫을 남겨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밭 모퉁이까지 모조리 거두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
남의 몫까지 차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얻은 부를 조금 떼어 헌금하거나 기부한 뒤,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가 기뻐할 일은 무엇일까?
주인에게 더 많은 것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한 일일까, 아니면 주인이 정한 대로 밭 모퉁이를 남겨둔 일일까?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
이제 내가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부분에 이르렀다.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들을 신앙적으로, 신적인 존재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예수가 신이라고 고백하는 일이 아니다.
누가 규칙을 만들었는지, 그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 공부하고, 그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신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일 수는 없다.
믿음은 그가 정한 규칙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보여준 삶의 태도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흔히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과 행함을 구분한 뒤, 참된 믿음이라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나아가고 싶다.
행함은 믿음에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믿음이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면서도 탐욕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도 믿는다.
교회도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착취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삶을 바꾸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
반대로 불교 신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며, 밭 모퉁이를 남기는 삶을 살아간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면 인정하고 바로잡는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정한 규칙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주인이 돌아왔을 때 누구를 기뻐하겠는가?
자신을 창조주라고 정확히 불렀지만 규칙을 어긴 사람일까,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규칙을 지킨 사람일까?
나는 답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준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첫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는다.
예수는 묻는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느냐고.
답은 첫째 아들이다.
아버지에게 뭐라고 대답했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의 뜻을 행했느냐가 중요했던 것이다.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 아들인가?
입술로는 “예, 주님”이라고 대답하면서 정작 포도원에는 가지 않는 둘째 아들이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첫째 아들을 우리가 함부로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는 것은 귀신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귀신들도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
신앙고백은 믿음에 관한 진술일 수 있다. 그러나 신앙고백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이 구별을 놓치는 순간,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의 정체를 올바르게 인정하는 종교가 되어버린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보다 예수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진다.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보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지지만,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예수가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늘리기 위해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했고, 병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종교적 권위의 위선을 꾸짖었다. 탐욕과 권력에 맞섰고,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다.
그가 신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그가 보여준 삶의 방식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가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다시 들어갈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믿음을 이해하면 천국에 관한 생각도 달라진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 이 세계가 이미 하나님 나라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있다.
불교 신자든 무신론자든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남의 몫을 남겨두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예수를 신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이미 주인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데, 주인의 정체를 모른다는 이유로 그 집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말인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나라로 가는 입장권이 아니다.
이미 살아가고 있는 그 삶을 계속하는 것이다.
물론 주인이 돌아오는 날의 심판과 부활은 별개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일은 죽은 다음으로 미룰 일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다.
반대로 교회에 다니면서도 탐욕과 착취를 일삼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규칙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니라 회개다.
지금의 삶을 바꾸는 일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인간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이제 그 방식대로 살아가라고 촉구한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나라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가 보여준 방식대로 살아가기보다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그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해 온 것은 아닐까?
예수가 가리킨 삶은 외면한 채, 예수가 자신을 데려가 줄 미래의 장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
기독교인의 편인가? 교회의 편인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는 사람의 편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편을 만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도, 부정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에 따라 편을 가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탐욕과 착취를 옳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과 정의를 그르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삶과 그들을 돌보는 삶을 똑같이 판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판단의 기준은 종교적 소속이나 신앙고백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온 삶이어야 한다.
주인이 돌아오는 날, 자신의 이름을 얼마나 열심히 불렀는지보다 자신의 규칙을 얼마나 충실하게 지켰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이야기한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를 영접했는지, 병든 사람을 돌보았는지를 묻는다.
흥미로운 것은 의인들이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도왔느냐고 되묻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주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 도왔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이 가장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한 일이 곧 자신에게 한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씀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예수가 보여준 삶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삶은 보상을 받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밭 모퉁이를 남겨야 하는 이유는 훗날 하나님에게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밭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몫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도 심판이 두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잘못된 일을 계속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이 내일 돌아오든 천 년 뒤에 돌아오든 마찬가지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러나 그 말은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정한 통치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 예수가 보여준 삶의 태도가 옳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물론 나 역시 늘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탐욕을 부릴 때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을 신앙고백이나 기도로 덮어두지 않는 것이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멈추고, 돌이키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고, 그것이 믿음이다.
주인이 돌아오는 날, 나는 내가 주인의 정체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는지 자랑하고 싶지 않다.
주인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불렀는지, 그 이름에 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았는지 내세우고 싶지도 않다.
다만 주인이 없는 동안 그의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고 싶다.
내가 누군가의 몫을 빼앗지는 않았는지.
내가 외면한 사람은 없었는지.
내가 망가뜨린 것은 무엇이며, 바로잡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남겨둔 밭 모퉁이가 있었는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 아니다. 주인이 정한 규칙대로 살아가는 일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었고 부활했으며 그가 하나님이라 인정하는 일이 아니다. 예수가 보여준 삶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는 일이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주인의 집에서, 주인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