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바다를 담아
흰여울문화마을을 둘러보자 결정한 것이 과연 맞는 선택이었을까?
고온다습한 해안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몇 번이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선글라스는 폼이 아닌 생존품이고, 양산을 든 팔은 따사로운 태양빛에 따가워질 때 지금 당장 에어컨이 있는 어딘가로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는 외침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이번 부산 여행은 일자별 대략적인 가이드 계획만 세웠지 세세하게 일정을 쪼개지는 않아서 상황에 맞춰 이동하고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카페 가서 커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찾는 와중에 이모네가 추천한 곳이 흰여울문화마을이었다. 예쁜 카페나 소품샵이 많다고 좋아할 거라고 했다. 어디를 가든 딱히 상관이 없어 안 가본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고, 우린 서둘러 택시를 불렀다.
10여분을 달려 도착한 영도. 다리의 저릿함을 유발하는 부산의 대교를 건너 도착한 흰여울문화마을은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작열하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길게 이어져있는 해안 절벽길을 따라 낮은 주택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탁 트인 바다 풍경이 정말 멋졌다. 반짝이는 윤슬과 후덥 한 바닷바람까지 진짜 부산에 온 것이 실감 났다. 하지만 멋진 풍경과 함께 태워 죽일 듯 뜨거운 해 때문에 서둘러 양산을 꺼내 들었다. 다른 여행객들이 사진 찍는데 방해가 될까 봐 미안했지만, 도저히 양산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를 막고 안 막고에 따라 팔이 따갑고 안 따갑고 가 결정되었다. 광활한 바다를 앞에 두고 자꾸만 몸은 양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아직 그리스 산토리니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찾아보곤 했던 파랗고 하얀 분위기가 비슷한 흰여울문화마을을 걸어가는 동안 마치 외국에 온 기분이었다. 비록 간판에 한글이 있고 다소 정감 있는 건물들이 보이긴 해도 작은 상점들과 알록달록한 색감이 주는 마을 분위기가 서울의 그것과는 달라서 그랬다. 동양인, 서양인 할 것 없이 외국인도 정말 많아서 더욱 이국적인 환경에 놓인 기분이었달까.
내리쬐는 태양 아래 한참을 걷지도 못하고 절로 실내를 찾게 됐다
"우리 잠깐 좀 어디 들어가자. 더 이상은 안 돼, 진짜로."
양산이고 선글라스고 더 이상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간은 이렇게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 마침 보인 작은 소품샵. 홀린 듯 들어갔는데 우리 근처에 있던 외국인들도 약속한 듯 빨려 들어갔다면 이건 이제 운명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마을을 이루는 가게들을 피난처였다. 사장님들껜 정말 죄송하지만, 몇 분 더 걸었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에어컨이 있는 실내를 찾아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예의상 뭔가 하나를 꼭 사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부산다운 물건이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쭈뼛쭈뼛 인파를 뚫고 상점을 하나 둘 들고 나길 반복하던 그때, 기대하던 분위기의 예쁜 상점을 발견했다.
해안가 마을에 왔으니 바다의 기운이 느껴지는 가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발견한 상점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곳만의 컨셉이 확실했고 무엇보다 '바다가 가게가 되었다면'이라는 상상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것이 좋았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자개 파우치와 모빌, 바다를 빚어낸 듯한 조개 그릇들과 물고기 인형들. 느낌이 좋았다. 아마 이곳에서는 뭔가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부산 여행의 흔적을 남길만한 무언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일행은 모두 취향이 달라서 자유롭게 가게를 구경했다. 그리고 부산의 흔적을 모두 함께 남길 수 있을만한 물건을 하나 찾았다.
"이거 어때? 우리 하나씩 맞출까?"
"이모도 아까 이거 같이 맞출까 얘기했는데. 난 좋아."
투명한 볼 안에 압화가 있는 수제 팔찌. 과하지 않게 바다 느낌도 나고 7,000원이라는 가격도 매력적이었다. 한 둘만 마음에 든 것이 아니라 모두 맞추는데 동의해서 우린 하나씩 팔찌를 골랐다. 사실 나는 파란 꽃과 하얀 꽃 중에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하얀 꽃이 질리지 않고 어디에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얀 꽃을 골랐다. 모두 하얀 꽃을 골라서 자연스레 하얀 꽃이 모두의 손목 위에 피었다.
평소에 안 사는 물건도 여행지에서 만나면 특별한 것이 된다. 돈 주고 액세서리 사는 일이 잘 없는 내게 이 팔찌가 그랬다. 엄마도, 이모도, 동생도 함께 손을 모아 사진을 찍은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눈부신 부산의 여름 바다 앞 어느 마을에서 맑게 빛나는 우리의 손목과 그 위에 핀 꽃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