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옥

확신의 위기감

by아인장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것도 운이다. 8월에 여행을 하겠다 마음먹었을 때부터 여행을 여행답게 할 수 있는 운을 제 손으로 멀리 쫓아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린 막연한 기대 속에 이제 보니 용기 있던 결정을 내렸고 결국 불지옥에 뛰어들 운명이었던 것인지도 역시 모르겠지만.


부산행 티켓을 끊기 전에 작년과 재작년 8월 말 부산의 날씨를 찾아봤다. 35도 안팎을 웃도는 고온이 계속되다가 다행히 8월 말에 접어들면서 30도를 웃도는 정도로 조금 떨어진 기온을 확인했다. 가을 같은 시원한 날씨는 아니어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온도는 피하자는 전략이었다. 여름이니까 30도에서 32도 정도야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올해도 과거와 비슷할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면서.




무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 부산역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어라, 왜 서울보다 더운 것 같지?'


정확히 덥다는 표현보다 뜨겁다는 표현이 옳았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위, 횡단보도 옆 분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스트 같은 물을 맞으며 이게 지금 맞는 건가 정신이 아찔해졌다. 매년 여름마다 역대급 더위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뉴스와 인류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러온 건가 회의감을 느끼게 하는 기온 속에서도 나름의 평정심을 지켜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부산은 분명히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


양산을 왜 쓰는 걸까. 아무 소용이 없는데. 선글라스는 태양으로부터 내 눈을 지켜줄 수 있는 걸까? 이래서 여행을 제대로 할 수는 있으려나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만약 정말 걱정이 눈이 된다면 8월에 정말로 기적의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고 당시 부산에 있던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을지도 역시 모를 일이지만.


단순히 덥다는 표현으로는 차마 다 말할 수 없던 부산의 날씨에 우린 자주 택시를 탔다. 1년에 택시를 한 번 탈까 말까 하는 나로서는 정말 희귀한 일이었다. 하지만 택시를 타자는 일행들의 제안에 반기를 들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에어컨이 없다면, 정말 단 한 발자국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으므로.

저널링-이미지_01.png〈지옥 속의 천국〉 한국, 부산

해변열차를 타고 구덕포 정거장에 내려 들어간 얼음 왕국과 같았던 카페에서 통유리창 너머로 바닷가 풍경을 바라볼 때는 바다가 참 평화로워 보였다. 파도도 없이 잔잔하고 마냥 푸르기만 한 착한 풍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숨 막히게 뜨거웠던 바깥공기는 잊어버린 채로, 애초에 왜 이 카페를 도망치듯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지 잊어버린 채로 속 좋게 즐길 수 있었다.


올여름의 부산은 이렇게 잠깐씩 맛보는 인공적인 냉기 없이는 도무지 즐길 수 없었다. 지금도 당시의 부산을 떠올리노라면 숨이 턱 막힌다. 서울이 31도였을 때 왜 우린 35도에 근접했던 부산에 있었던 걸까.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날 저녁, 서울역을 빠져나갔더니 서울이 아주 시원했다. 서울은 마치 이른 가을이 찾아온 듯 습도도 없이 쾌적했다.


"와, 서울은 왜 시원해?"

"비행기도 안 타고 동남아 갔다 온 것 같지 않니."

그제야 우린 모두 정신을 좀 차렸던 것 같다.


더위와 습도에 혼을 쏙 빼앗기다가도 잠시 차가운 실내 공기에 치유받으며 구워지다 얼려지기를 반복하면서 우리 스스로 선택한 불지옥을 기꺼이 감내한 여행자였다. 숙소를 나서면서부터 시작된 불지옥이 늦은 저녁 다시 숙소로 돌아와 씻고 빵빵한 에어컨 바람에 열기 가득한 몸을 식히고 나서야 끝나길 반복한 이틀이었지만, 고생한 만큼 깊게 남은 부산에서의 뜨겁고 강렬한 기억을 오래도록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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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