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이는 낭만에 대하여
나는 여행 짐을 싸는 게 참 쉽다. 필요한 걸 놓고 가는 일도 상당히 드물다. 왜냐하면 내게 여행 준비물 리스트가 빼곡히 적힌 메모 파일이 하나 있기 때문인데, 이 리스트 하나씩 체크해 가며 짐을 싸면 불필요한 걸 더 넣으면 넣었지 챙겨야 할걸 놓고 가는 일은 없다. 보드게임, 지퍼백, 읽을 바카라 1권까지 — 세세하게도 적어뒀다. 그리고 매번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조금씩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목록은 갈수록 탄탄해진다.
사실 이번엔 짐을 싸며 목록 속 많은 것을 챙기지 않았다. 국내 여행에는 불필요한 물건이 많았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것이 ‘여권’이었다. 생각해 보니 가장 최근에 다녀온 국내 여행이 3년 전이다. 해마다 한 번이나 두 번, 해외로 여행을 갔기에 여권은 가방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물건이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체크하고 또 체크하는 필수품인데 이 여권을 두고 가려니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었다.
“엄마, 여권 챙겼지?”
어색함을 작은 유머로 바꾸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기 때문에 부산에 가능한 일찍 도착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오전 8시 12분 열차표를 끊었고, 그럼 기상 시간은 그것보다 훨씬 앞당겨야 한다는 사실은 표 살 때 잠깐 잊었던 것 같다. 여행 전날, 평소보다 일찍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어찌나 어려운지. 때로는 늦게 자는 것보다 일찍 자는 게 더 힘들다. 출발 당일, 서울역에 조금 빠듯하게 도착했다. 아침을 못 먹고 출발하니 뭐라도 먹을 걸 사야 한다는 생각을 서울역 가는 내내 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 몸은 원래 루틴과 다르게 움직이면 시간이 어떻던 곧바로 배꼽시계를 울린다. 한마디로 집을 나설 때부터 배가 고팠다는 얘기다. 그러니 다소 촉박하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샌드위치든 토스트든 뭐든 간에 사들고 열차에 올라야만 했다.
출발을 10분 남기고, 서울역 파리크라상에서 샌드위치와 베이글을 사서 열차에 무사히 탑승했다. 욕심은 좀 오래 빵을 고르고 싶었는데 그것까진 안 됐고, 가장 후회 없을 선택으로 블랙 올리브 베이글을 골랐다. 차가운 샌드위치가 별로 안 당겨서 먹음직스러운 베이글을 골랐다. 나는 선택을 참 잘한다. 베이글은 아주 촉촉하고 달콤 짭조름해 정말 맛있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내린 결정이 이렇게 완벽할 때 정말 짜릿하다. 물론 그 베이글, 내가 다 먹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베이글은 쳐다도 안 보던 일행들은 내가 고작 4분의 1쪽 먹은 베이글을 어느샌가 사이좋게도 나누어 해치웠다. 내가 베이글에 잠시 감탄하고 있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음, 그럴 거면 당신들도 베이글을 사지 그랬니? 어이를 조금 잃으며, 도착해서 먹을 피자만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부산행 열차는 힘차게 출발했다.
요즘 여행을 하면 전보다 설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색다른 장소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 비행기에서, ITX 새마을호에서 그림을 그렸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이동하는 환경 속에서 도착지까지 남은 한정된 시간 동안 그림을 하나 그려내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KTX를 타고 부산까지 소요 시간은 약 3시간. 2시간은 조금 빠듯했던 경험을 미루어 볼 때 더욱 기대되었다. 이번엔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움직이는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의 가장 큰 특징은 고정된 장면이 없다는 것. 비행기에서는 창밖 풍경을, ITX에서는 눈앞의 좌석과 사람들을 그렸지만 그것들은 모두 변했다. 파란 하늘 속 하얀 구름이 있는 풍경에서 작은 섬들이 보이는 풍경으로, 넓은 들판과 터널을 교차하며 달리는 기차는 승객들을 토해내고 다시 새로운 승객들을 태웠다. 이러한 변화는 나만 아는 이야기가 녹아든 특별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된다. 내 마음대로 바꾸는 것들이 종종 생긴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이번엔 조금 더 이 순간을 명료하게 담는 방법이 없을까? 변화가 비교적 적은 장면이 어디 없나.
짧은 고민 끝에 내가 만든 장면을 그려보기로 했다. 일행들과 함께 산 열차 간식들을 그리자! 후다닥 고른 빵들과 그 사이 편의점에서 집은 캔커피들. 부산으로 가는 동안 사라지지 않을 마음에 드는 장면을 찾았다. 물론 빵들은 얼른 먹어버려서 미리 찍어둔 사진으로 대체하고, 마시는 중인 커피들은 잘 세워둔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네 명이서 가는 여행이라 4인 동반석을 예약한 덕분에 둘씩 마주 보며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기에 그림 작업도 훨씬 수월했다. 접이식 테이블 위 간식들을 올리고, 다행히도 날씨 좋았던 창밖 풍경도 담았다. 자갈 깔린 선로를 어지럽게도 빠르게 달리는 열차 덕분에 자세한 묘사가 필요 없었던 것 역시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얇은 펜으로 조심조심 드로잉을 하면 눈앞의 장면과 머릿속에서 계획한 이미지가 천천히 손을 빌어 출력된다. 실제와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아도 내 감각으로 만들어낸 따스한 그림이 되어가는데, 그 과정이 정말 즐겁다. 한참 달리는 열차는 쿠궁쿠궁 열차 소음과 다음 역을 안내하는 전자 음성을 제외하면 꽤 조용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나만의 행복에 집중할 수 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KTX도 터널을 섞어 달려 갑자기 어둡고 갑자기 밝은 환경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확확 바뀌는 화면이 다소 혼란스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흑백으로 완성된 이미지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 완성에 가까워질 때에도 즐거움에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적당히 떨리는 선과 물맛 가득한 색으로 완성된 부산 여행길의 첫 그림. 포근한 동화바카라 같은 모습에 정말로 흡족했다.
지금까지 움직이는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그럴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멀미를 안 한다. 유일하게 하는 멀미가 배 멀미인데, 배를 탈 일은 잘 계획하지 않으니 앞으로 배에서 그림 그릴 일이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그 밖의 모든 교통수단 안에서 나는 무적이다. 작은 어지럼조차 없는 축복받은 신체. 나는 그걸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거다.
“나는 저렇게 못 해.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게 아니라, 애초에 멀미가 나서 못 해.”
“아?”
그렇군, 멀미가 나면 이걸 못하겠구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타든 멀미를 하는 사촌 여동생의 말에 깨달았다. 흔들리는 열차 안 역방향으로 앉아 시속 330km로 달리면서도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내 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덜컹이는 낭만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