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네슘도, 암막 커튼도 통하지 않는다면
중년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어색하지만, 40대 중반이 되었으니 나는 완연한 중년 여성이다. 내 또래 친구들이나 언니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나누는 이야기는 단연 건강이다. 건강에 좋다는 운동도 결국 체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나이가 된 것 같다며, 우리는 자조 섞인 웃음을 나눈다.
다정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건 체력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몸도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지고, 그 건강한 에너지는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닿는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임계점도 자연스레 높아진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응원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가족의 평온한 하루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괜찮은 컨디션’ 정도는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은 잠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잠 때문에 고생하는 지인들이 많다. 얕은 잠, 불면, 자주 깨는 밤. 나이가 들수록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는 말을 실감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나처럼 잠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해야만 비로소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는 사람, 푹 잔 날의 활력과 그렇지 못한 날의 피도로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사람에게 충분하고 건강한 수면은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다. 밤새 푹 자고 일어난 날은 온 세상에 다정해질 수 있을 듯한 여유와 인류애가 생긴다. 안타깝게도 설잠을 잔 다음 날은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같은 말을 해도 목소리의 톤부터 달라진다. 내가 바라는 '평온하고 여유롭고 아름다운 삶'을 굴러가게 하는 밑천은 다름 아닌 '밤의 시간'에서 나온다는 걸, 이제는 몸으로, 감각으로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하루 네 시간만 자도 개운하다는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도 있다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니다. 나를 잘 알지 못하던 시절, 그토록 염원하던 '미라클 모닝'에 호기롭게 도전한 적이 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 5시, 그 고요하고 적막하고 어둑한 공기 속에서 글을 쓰고 바카라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새벽의 기적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 주는 정신력으로 버텼지만, 그 후론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난 7시 무렵부터 눈이 저절로 감겼다. 소파에 누워 '딱 10분만 눈을 붙이자'던 야무진 계획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번쩍 눈이 떠지며 허망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비몽사몽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웃픈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도전해 보았지만, 결과는 늘 비슷했다. 미라클 모닝이 아니라 '미라클 낮잠' 혹은 '신생아 분할 수면'의 연속이었다.
그렇다. 나는 나폴레옹과는 애초에 유전자부터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최소 일곱 시간, 가능하면 여덟아홉 시간은 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람’의 형색을 갖추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골 같은 체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주위에서는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잘 자는 나를 부러워하곤 한다. 그런 나도 예전 같지 않다.
밤 9시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도 침대에 누우면 몇 분 만에 스르르 잠들었는데, 요즘은 오후 두 세시를 넘겨 커피를 마시면 그 여파가 밤까지 이어진다.
자기 전 스마트폰 사용이 수면에 쥐약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도 어떤 날은 '딱 20분만 보고 끄자' 했것만 정신을 차려보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기도 했다. 알고리즘의 유혹에 더 이상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핸드폰을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유배 보낸 뒤 침대에 눕는다.
대신 침대 옆에는 내 꿀잠을 바카라임지는 든든한 메이트들이 있다. 하나는 눈의 피로를 싹 녹여주는 온열 안대. 그리고 또 하나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무해한 '천연 수면제'가 되어주는 바카라들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침대에서 바카라을 펼치면,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도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한 『경우 없는 세계』도 그랬다.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대사도 좋아서 조금 더 싶었는데, 몇 분 읽다가 바카라장을 덮고 말았다.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재미있는 소설의 운명도 이럴진대, 내 침대 옆 바카라들 중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건 따로 있다. 바로 벽돌바카라의 대명사, 『총, 균, 쇠』다.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눈이 감긴다.
얼마 전 마그네슘도 먹어보고, 운동도 하고, 암막 커튼을 치면 수면에 좋다고 하여 침실 인테리어까지 싹 바꿨는데도 도통 잠을 못 자 괴로워하는 지인을 만났다. 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나의 숙면을 부러워하는 그녀에게 나만의 천연 수면제를 권해보았다.
“혹시… 『총, 균, 쇠』 읽어봤어?”
살짝 놀란 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전문가의 그럴듯한 조언은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몇 달 동안 내 몸을 생체 실험해 본 결과, 나에게는 아주 효과가 좋았다.
부디 내가 아끼는 그녀가 오늘 밤에는 푹 잘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완독 하고 싶은 바카라, 『총, 균, 쇠』를 오늘 밤에는 조금 더 읽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