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은 올 때마다 설렌다.
몇 년 만에 방문한 거라 더 그럴 수도 있겠다. 집에서 예술의 전당까지는 한 시간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이날은 날씨도 화창해서 걷는 시간마저 좋았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정만화 속 주인공처럼 하늘하늘 여리한, 보고 있으면 절로 자세를 곧추세우게 되는 학 같은 발레리나들.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바삐 지나가는 배우. 왠지 모르게 여유롭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커플. 채도가 높고 따뜻해 더 맛있어 보이는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의 과일 그림이 담긴 엽서와, 파리크라상에 진열된 빵들까지 유독 미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곳곳이 다채롭고 흥미로워 눈이 즐거운 공간이었다.
예술의 전당에 온 건, 발레를 좋아하고 오래 해 온 첫째와 데이트하라며 발레 뮤지컬 티켓을 선물해 준 친구 덕분이다.
<나빌레라>.
웹툰과 드라마로 워낙 유명했던 작품이라 제목은 익숙했지만 정확한 뜻은 몰랐다. 왠지 나비와 관련된 말 같아 찾아봤더니 정말 그랬다.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문구로, ‘나비’와 ‘-ㄹ레라’가 합쳐져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모습’을 뜻한다고 한다.
중학생이 된 첫째가 갑작스럽게 학원 보강에 가게 되면서, 결국 공연은 수현이(둘째)와 함께 보게 됐다.
두둥,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발레를 향한 열정과 꿈을 평생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온 일흔여섯의 덕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불안한 현실 앞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접으려는 스물세 살 청년 채록.
두 사람은 덕출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뒤, 더는 꿈을 미룰 수 없다는 마음으로 찾아간 발레 학원에서 만나게 된다. 기억이 점점 흐려지는 덕출과 방황하던 채록은 발레를 통해 서로를 응원하며, 꿈을 향에 조금씩 나아간다.
초등학생 관람가이지만 수현이가 이해하기에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친구의 이야기도 있었고, 공연장에도 초등 저학년 아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3학년이 된 수현이가 얼마나 집중해서 볼까 싶었는데, 웬걸. 그 누구보다 배우들의 연기와 스토리에 푹 빠져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이 되자, 수현이는 얼른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며 누구보다 먼저 공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덕출의 수첩을 우연히 보게 된 채록은,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그의 병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발레가 덕출에게 얼마나 큰 의미이자 행복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발레 공연을 앞두고 증상이 심해져 더는 무대에 설 수 없겠다고 말하는 덕출을 채록은 끝까지 설득한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에도 덕출의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결국에는 채록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공연장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특히 내 왼쪽에 앉은 수현이는 오열 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쳐다보는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둘째는 아무래도 첫째를 키우며 쌓인 경험치 덕분인지 조금 더 수월하다고들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참 효녀였던 우리 수현이. 조리원에서도 잘 자고, 잘 먹고, 잘 웃는 아가라 조리원 선생님들께서 "이런 애들은 집에 가서도 순하다"며 내게 복 받았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은 정말이었다.
"엄마, 지금까지 본 연극 중 최고였어. 인생 발레 뮤지컬이야!"
말도 다정하게 해 주는 수현이 덕분에 행복한 일요일이다.